이제는 그만두고 싶은, 그만 듣고 싶은 질문
나는 사회적 민감성이 아주 높은 사람이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어떤 종류의 피드백이 오는지를 중요하게 따진다. 누구에게 기분 상하는 말을 들었을 때뿐 아니라 내가 누구를 기분 상하게 했다는 마음이 들면 그 마음이 하루를 간다.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되어 변수 없이 안정적인 관계에 편안함을 느낀다. MBTI 검사를 하면 외향성이 짙은데도 가까운 이를 더 만들지 않는 데는 이런 기질이 한몫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높으냐면 정말 무지막지하게 높다. 백분위가 98이다. 나라고 이런 내가 좋을까. 끊임없이 상대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 너무도 피곤해서 산속에 들어가 홀로 지내고 싶다가도 사람들의 인정과 애정이 고파 다시 사람들 속으로 파고든다.
그런 내 생에 정말 힘든 말 중 하나가 “왜 나한테는 먼저 말 안 했어?”다.
이 말이 말해지는 배경은 대략 이러하다
나에게 어떤 소식이 있다
누군가는 그 소식을 나에게 들었고, 다른 이는 전해 들었다
전해 들은 이는 내게 와서 말한다. “왜 나한테는 먼저 말 안 했어?”
그는 내가 그를 덜 친하게 여겼다며 서운해한다
나는 사과한다 (무엇을 잘못했지?)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거 비밀인데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하며 단짝에게만 털어놓는 얘기들이 있었다. 그 얘기가 입밖에 나가는 순간 이미 비밀이 아니게 된다는 점은 차치하고, 내가 그 얘기를 들었느냐 아니냐가 중요했다. 빨리 들을수록 그의 최측근에 있다는 뜻이었고, 두세 번째로 친한 친구들은 “이거 민수랑 너만 아는 건데…”하며 비밀 공유자들의 목록과 함께 이야기를 전달받게 됐다. 그런 걸로 내심 친분의 우위에 있음을 우쭐대던 시절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이런 상황을 마주하는 일은 ‘청첩장을 받았느냐’의 주제에서 종종 등장했다. 서운함을 토로하는 건 언제나 미혼인 내 쪽이었다. ‘나는 저 이에게 손절당했어’라는 마음으로 홀로 상처받곤, 청첩장을 받지 못한 결혼식은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금껏 지켜왔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가지 않는 게 당연하긴 한데 내심 유치하게 꼬인 마음이기도 했다.
단 한 번의 예외는 현재 애인을 소개해준 분의 결혼식이었는데, 그분은 결혼식장에서 나를 보고 크게 놀라시더니 식이 끝나고 기프티콘과 함께 장문의 감사와 미안함을 담은 연락을 보내왔다. 그때는 빚진 것이 있으니 응당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갔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실까 하고 말았다.
언제나 인간은 자기 차례가 와 봐야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지. 나도 결혼을 준비하게 됐다. 웨딩 촬영을 조금 이르게 했고,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바꿔 두었더니 “결혼하셨나 봐요! 소식을 못 들어서 늦었어요. 늦었지만 너무 축하드려요.” 하며 먼저 연락이 온 사람들이 지난 주간 몇 명 있었다. 못 가봐서 미안하다며 축의금까지 보낸 이들도 있었다. 결혼식은 아직이라 하면, 청첩장 나오면 꼭 달라며 남은 준비를 응원해 주었는데 그 반응이 나를 너무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얼떨떨하게 고마웠다.
왜 서운해하지 않지?
오히려 서운함을 내비친 이들에게 조금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아직 한참 남았어요, 얘기하려고 했어요, 우리 근래 연락하지 않았잖아요… 그런 마음들을 삼켰다.
얼떨떨한 고마움을 곱씹어 보다가 ‘왜 먼저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단짝이 아니라면 너는 나의 적이라는 기형적 관계 맺기를 지향하던 시절을 지나(이때의 친구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관계는 자연처럼 피었다 지고 흘러갔다 멈추고 닳고 무르익는다는 걸 이제는 이해한다. 그렇지만 각인처럼 새겨진 마음이 쉬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친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야 해, 먼저 알아야 해, 그런 마음들.
서운하기 시작하면 본질을 보지 못한다.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이 본질이다. 아프다는 소식을 늦게 들었다면, 걱정하는 마음이 본질이다. 이러저러한 삶의 이야기들을 놓쳤다면 우리가 소통하지 못할 만큼 바쁜 삶을 살고 있음을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이 먼저이다. 가까운 이어도 말할 수가 없었거나, 말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보기로 한다. 사회적 민감성 98에게는 ‘혹시 나를..?’로 시작하는 수많은 상상을 차단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정말로 관계의 종말을 고한 것인지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되어서 내게 곁을 내준 것일지는 모를 일이니까.
나도 누구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듣게 되면 꼭 먼저 연락해야겠다는 새로운 신념을 가져본다.
그렇게 관계에 조금 덜 전전긍긍하고 조금 더 뭉툭하게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