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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파리 Mar 18. 2022

26살 나의 아들은 여전히 건설현장 노동자입니다.

자식농사


동지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직 새벽 사위가 밝아오기 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 깼다.

아들 녀석이 현장에 나갈 채비를 하는 소리였다.


내가 깨어 있는 걸 알았는지

'다녀올게요~~~'

혼자 인사를 하며 문 밖을 나선다.

애초에 대답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잘 다녀와~'

...라는 내 대답은 문 닫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문이 닫히고 나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혹시... 그동안 내가 자고 있든 말든

혼자 저렇게 허공에 대고 꼬박꼬박 인사를 하며 나간  아니었을까!

순간 갑자기

가슴 한편이 뭉클해고 코끝도 찡 해졌다.


요즘 이런저런 걱정이 많아 잊고 살고 있었는데

그렇지... 참

이 녀석 이렇게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각에 항상 집을 나서고 있었지.

.

잘 살고 있었네...!


요즘 서로 사이클이 안 맞아

새로운 현장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는데

여하튼 밝은 목소리로 나가는 걸 보니 걱정이 한시름 놓다.

잠이 깬 김에 나도 일찍 나갈 채비를 해본다.




지난여름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간만에 일찍 집에 와보니

이미 현장일을 마치고 돌아와 치맥과 함께 꿀잠을 자고 있는 녀석을 보며 몇 자 적었던 적이 있다.

그때 참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해주었었는데...


실은 이후 녀석이 심한 슬럼프를 겪었었다.


3개월 정도 떤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거의 매일 집에 오 그날 생긴 불만과 짜증을 토해내곤 했다.

없는 불만과 고....

거의 매일매일

'본인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

진지하게 민을 했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도살장 끌려가듯 일을 나갔고.


그도 그럴 듯이

몸 쓰는 일을 할 때안 좋은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던 아이가

이 목수일을 하면서부터는 매일매일 지적받고 혼나고 야단 맞고.

칭찬이라고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니 기가 죽을 법도 했다.


좋아하던 놀이가 일이 되었을 때의 압박감.

그 압박감 때문인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세대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분들과 일을 하다 보니

(대부분이 자기 나이 두 배 정도 되는 분들) 현장생활도 많이 힘들어했다.

뭐 하나 힘들지 않은 것이 없어 보였다.


아들 녀석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몇 개월 계속 보다 보니

나도 생전 안 해본 깊은 상념에 빠졌다.


내가 그동안 녀석의 진로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하고.

나는 어떻게 그렇게 무모하리만치 불안감이 없었을까.

 나는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추천했을까 하는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어릴 적 공부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였는지 

자식을 키우면서 나는 한 번도 공부해라~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단 한 번도 공부 좀 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시험공부 또한 시켜본 적이 없다.

한글만은 깨치고 학교를 보내고 싶었으나

그것이 잘 되지 않아서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림장을 제대로 써 왔다.

그러니 학해서 1년 동안의 받아쓰기는 매일매일 빵점이었다.

그 덕에 처음 10점을 받아온 날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

그리고 갑자기 40점을 받아온 날,

우리 집에는 잔치가 열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안학교를 거쳐 중고등학교 졸업장은 검정고시로 대체했고 대학 진학은 하지 않았다.

입시교육은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그 시간을 지내오는 동안 나는 그 어떤 불안감을 느끼지 못했다.

고등과정 때 이미 '이 녀석은 어디 가서 평생 자기 몫은 하고 살겠구나~' 싶어 걱정은 진작에 접어 었었다.


이후에도 아들은 씩씩하게 잘 살았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나서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한 돈과 내가 아기 때부터 모아준 돈(어른들한테 받은 용돈을 통장에 차곡차곡 모아서 20살 때 주었다)을 가지고 혼자 두 달여 동안 사교육 한번 안 받은 영어실력으로 산티아고 순례길과 유럽여행을 아주 잘 다녀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돌아 또 한 번의 유럽여행을 자기돈으로 잘 다녀왔다.


고등과정을 마치고 나서부터는 용돈 한 번 달라하지 않았고

늘 하고 싶은 걸  찾아 씩씩하게 잘 살던 녀석이었기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날 무척 당황하게 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혼자 헤쳐나갈 힘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길을 갔더라면 이런 고생은 안 했을 텐데...라는 회가 아니다.

사회초년생이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이니 참아야 한다...라는 것도 아니다.


나도 가보지 않은 길에 이 놈을 무작정 던져 놓고

네가 알아서 잘 헤쳐 나가 봐!

...라는 상황을 너무 처절하게 준 것 같아서

처음으로 마음이 쓰였다.


말은 직접적으로 안 했지만 혼자만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이 녀석을 너무 일찍 과신했던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이 잘 살 것이라고.

이 녀석은 뭔가 다를 것이라고.

너무 일찍 무모하게 판단했던가 아닌가 싶었다.


이 놈도 여느 아이들과 똑같 20대 청년인데...!


가슴 한편에 그런 각들이 생기니 안쓰러움이 커졌다.

그러면서 현장에서의 생활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늘 그렇듯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끔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이 평생 해야 할 일이 아니어도 되니 너무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고도 이야기했고

때로는

그래도 하고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나중에 받아들이자~ 라는 말도 하면서.


'다 잘 될거야~' 라는 막연한 응원과

'네 나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야~' 라는 힘 빠지는 조언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같이 욕도 하고 공감해주며

때로는 상황 상황에 맞는 사회생활의 팁도 알려주며 기다렸다.


슬럼프는 조금씩 극복하는 것 같았다.


문밖을 나서는 밝은 목소리를 들이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적어도 첫번째 슬럼프는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잠시 접어 두었던 목표 하나를 같이 준비하며 열심히 현장을 다니고 있다.


그 목표는 앞으로 또 어떻게 될라나.

이 녀석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눈에 불을 켜고 이 녀석의 삶이 궁금한 주변 사람들만큼 나도 궁금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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