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파리 Oct 12. 2022

화초키우기는 왜 50대이상의 여성들에게 특화된 취미일까

잠시 (시간)강사를 할 때 학생들에게 2학년 설계를 가르친 적이 있다.


2학년 설계 프로젝트 용도는 주택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설계를 시작하기에 앞서 건축주 가족의 시나리오를 짜오는 것이 커리큘럼의 순서였던 날이었다.


나는 다양한 가족의 구성도 허용할 생각이었지만

팀티칭을 하는 교수님의 의견에 따라 4인 가족 정도의 범위 내에서 시나리오를 짜오게 했다.


사실 이것부터 솔직히 맘에 안 들었다.

엄마/ 아빠/ 딸/ 아들 이렇게 4인 구성이 가족의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자체부터가  

시대에 안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가족의 탄생"이 최애 영화 중 하나인 나로서는 참으로 많은 가족의 형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그래서

한 명씩 건축주 설정에 대한 시나리오를 발표하게 했다.

한 명 두 명... 일곱 여덟 명......

발표를 듣다가 나는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똑같은 설정!

어쩜 이리도 같은 설정을 해오는 거지?


아버지는 작업실로 서재가 필요하고

어머니는 화초를 키우는 취미가 있어서 마당에 텃밭이 필요하고

딸은 옷이 많아서 드레스룸이 필요하고

아들은 게임이 취미라서 방음이 잘 되는 방이 필요하고


가끔 다른 설정이 나온다는 게 아버지가 집에서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주방이 커야 하고...


하아........ 어쩜 그리 다들 짠 것처럼 똑같은 건지!!!


살면서 보아온 가족의 행태가 이것밖에 없어서인지~

아니면 머릿속에 이상적으로 혹은 고착화되어 있는 가족의 행태가 이것이어서인지~


듣다 듣다 수업시간이 끝날 때 한마디 했다.

어떻게 건축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상상력이 부족한가요~

왜 서재는 꼭 아버지의 공간이어야 하고

어머니는 왜 꼭 화초를 키우고 텃밭을 원합니까?

나만 해도 방이 하나가 더 생긴다면 무조건 일 순위로 서재를 원하는데...

그리고 왜 게임은 꼭 아들의 취미여야 합니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면서 수업시간을 마쳤다.

다시 설정을 하라는 건 아니지만 생각을 좀 확장시켜 생각해 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날 저녁 앞서 발표를 못 한 몇몇 친구들의 수업을 다시 이어갔다.

그랬더니

어떤 학생의 시나리오에서 갑자기 어머니의 취미가 게임이 되어 있네......!

ㅎㅎㅎㅎㅎ


오후에 다른 수업이 있어 갔다 오는 동안

설정을 급하게 고친 게 너무 티가 났는데

또 그렇게 곧이곧대로 고쳐 놓은 게 귀엽기도 해서 웃어넘겼다는...!




그랬다.

나는 이때까지 내가 화초를 키우는 일에 관심이 생길 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똑같은 시나리오에 요즘 애들이 이렇게나 틀에 박혀 있다고

한탄을 하며 여기저기에 열변을 토하고 다녔는데...ㅠ.ㅠ

불과 몇 개월 뒤 내 취미가 그 시나리오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다......)


물론 지금도 나는 나에게 방이 하나 더 주어진다면 서재를 택할 것이지만

한 가지 변한 사실이 있다면 나도 화초 키우기가 취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가 코로나가 한창 터지고 바깥 이동이 자유롭지 않던 때라

코로나때문에 생긴 취미인지

갱년기의 호르몬 변화 때문에 생긴 취미인지

그 원인은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나에게도 발동이 걸렸다.

요즘 내 나이 때 지인들을 만나면 식물 이야기로 몇시간씩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거 보면

확실히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들 하나를 낳고 기르면서 모성애는 절대 타고 나는 게 아니라고

손모가지를 걸고 확신할 수 있었는데

그 조차도 이제 잘 모르겠다.

식물을 키우는 것에 진심이 되는 게

인간의 DNA 상 50대 이상의 여자들에게 뭔가 특화가 되어 있는 것인지

누가 연구 좀 해줬으면 좋겠다.  


암튼 그 이후...

집안의 화분은 점점 늘어났다.

계속 늘어나서 이건 내가 봐도 좀 심하다 싶었을 때쯤

아들의 경고가 들어왔다.

딱 이 정도가 좋다고... 더 이상 늘리지 말라고.


급기야 집의 주인이 화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절대로 더 이상은 늘리지 말라고

두세 번 엄중한 경고까지 들어왔다.


그런데 며칠 전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책상 위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응..... 독서모임에서 다른 분이 읽던 책인데 엄마가 좋아할 거 같아서 샀어.

아들이 선물해 준 책.

<이웃집 식물 상담소>


제목에 홀려서 들뜬 마음으로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갔으나

식물 상담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나의 어떤 기대와는 달리

식물을 매개로 한 내담자와의 인생 상담과 작가의 식물에 대한 존중이 주내용인 책.

식물의 관점에서 어떻게 식물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 것 같지만

첫 에피소드부터 끝날 때까지 책을 보는 내내 혼 나는 느낌.

실내에서 화분에 식물을 키우는 일과

잘라서 파는 꽃을 사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고

식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책.

"그 식물의 꽃과 열매를 본 적 있나요?"

"그 식물의 진짜 이름과 고향을 아세요?"

...라고.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이 물음에 반성이 안되고 반발심이 생기는지!


그리고 이 책의 서평 중 98%는 이 책이 무척 식물 키우기에 반성이 되고 인생이야기에 위로가 된다고 하니

나는 역시 대놓고 삐딱한 사람이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준 책.

이 책을 선물해 주고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아들에게는 이 후기를 꼭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올 때쯤에는 더 이상 화분이 늘어나 있지 않기를! 다짐 해본다.

이렇게 말하면서

네이버 쇼핑에 "수채화 고무나무"를 검색하고 있지만

아들과의 약속은 지키보자고 다짐을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26살 나의 아들은 여전히 건설현장 노동자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