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참으로 다사다난하다. 코로나로 인해 내 계획이 꼬이는 것과는 별개로 집에서도 여러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막 봄이 됐을 뿐인데, 연말까지 달려가기가 벌써부터 버겁다. 어머니께서 자가격리를 하신 건 시작에 불과했던 거였나 싶다.
내게는 할머니, 할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이 외할머니 한 분 계신다. 중학교를 다닐 때 가장 먼저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이어 친할머니께서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다. 1919년에 태어나셨던 친할아버지께선 100세 잔치를 코앞에 둔 2018년 막바지에 한 세기의 생을 마감하셨다.
친가는 말 그대로 대가족이다. 아버지께서 7남매시고, 각자 둘 이상씩 자녀를 가졌다. 친척형들 모두 조카를 둘씩은 낳았으니 할아버지 기준에선 엄청난 대가족이었다. 할아버지의 첫 증손주이자 내 첫 조카는 나와 나이 차이도 10살 조금 넘게 날 뿐이다. 명절 때마다 가족들이 모이면 집안이 떠나가도록 화기애애했다. 대가족이었기에 우리는 할아버지 100세 잔치를 준비하면서 대가족다운 가족사진을 찍기로 계획했었다. 그렇지만 이를 이루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외할아버지니,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땐 솔직히 많이 슬프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렸기도 했고, 이별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땐 아쉬움이 컸다. 30대 초입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 그랬다.
부모님의 영향과 더불어 친척들과의 화목함은 내가 결혼을 일찍이 하고 싶었던 이유였다. 누구에게나 우리 가족을 자랑할 때면 친척들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가족의 화목함은 자랑거리였고, 여기에 나도 기여(?)하고 싶었다.
예전 가치관에 따라 남자만 따졌을 때 아버지가 막내, 그 막내의 아들이 나였다. 그리고 외가 쪽에서는 어머니가 첫째, 그 장녀의 첫 아이가 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친가나 외가 모두에서 난 사랑받을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양 조부모님께 큰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거의 명절 때에만 뵙긴 했어도 어릴 적 난 양가의 사랑을 독차지한 존재였다.
그래서 나도 어엿한 성인이 됐음을, 사랑둥이가 자녀를 가진 아버지가 됐음을 조부모님께 자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화목한 우리 가족에 또 하나의 행복을 주고 싶었다. 손위 형들은 다 해냈는데 나만 이루지 못한 채 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아쉬움이 더욱 컸다.
그렇게 2년여가 흐른 뒤 외할머니께서 위독해지셨다. 외할머니께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시골집을 정리하고 우리 집 근처로 거처를 옮기셨다. 우리 가족과 작은 이모가 외할머니를 부양했는데, 이모가 충청도로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거의 어머니께서 전담하셨다.
평소에도 잔병치레를 많이 하셨다. 코로나19로 햇빛조차 보지 못하시고 집안에 계시는 시간이 더 많아져서
그런지 지난해부터 기력이 많이 쇠하시더니 얼마 전 시급을 다투는 상황까지 맞았다. 각 지역에 흩어져 지내던 외가 친척들도 속속 서울로 올라왔다. 나 역시 어쩌나 싶어 간간히 찾아갔다. (병원에서 일하는 동생은 이 상황에서조차 5인이 모이지 않도록 주의를 주더라.)
지난해에도 해결할 일이 있으면 시간적 여유 있는 내가 할머니를 찾아가 거들었었는데, 그 당시와는 너무 달랐다. 숨조차 쉬시기 버거워하며 누워계시는 외할머니 모습을 보며 많이 쓰라렸다. 첫째 이모는 할머니께서 식사도 하시기 어려워 물 적신 손수건으로 입만 축이신다고 했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버지께서야 그야말로 상남자시니까.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어머니께선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당시 졸도하실 만큼 우셨다. 자가격리 영향으로 아직 기력이 채 회복되지 않으셨는데, 이 와중에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면 어머니께서 감당하기 어려우신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가 가장 먼저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 남은 외할머니에게 할 수 있는 효도를 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절망감도 찾아왔다. 지금이야 결혼과 가정에 대한 가치관이 그때와 다르지만, 외할머니께선 전통적 가치관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닌가. 종종 찾아뵐 때마다 "우리 종영이 얼른 색시 데리고 와야지", "할머니도 손주 좀 보고 싶다"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외할머니셨다. 그럴 때마다 웃으며 "할머니 잘 보살필 착한 손주며느리 바쁘게 찾아다니고 있으니 기다려주세요"라고 답했던 과거의 내가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다행스럽게 위기는 넘기신 듯했다. 이제는 조금씩 식사도 하신다. 그러면서도 주변 정리는 계속하고 계셔서 가족들의 마음이 많이 무겁다.
아직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 건강도 빨간불이 들어오고야 말았다. 이제는 연세가 있으셔서 다른 어르신들처럼 혈압이나 당 관리를 하셔야 한다. 처음 병원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약을 먹을 만큼 수치가 바뀐 적이 없었는데, 며칠 전 검진에서 약 복용을 해야 한다는 결과를 받아오셨다.
외할머니 걱정에 잠 못 이루신 날이 많아져 그런 거라 내심 바라고는 있지만, 어머니까지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나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질 수가 없었다. 하필 아무런 힘도 없는 이 시기에 이런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지 답답할 노릇이다.
모든 자녀들이 부모님은 항상 굳건한 버팀목이 될 거라 막연히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었다. 적어도 내가 당당히 한몫을 하며 쉼 없이 나아가는 모습을 오랜 기간 바라봐주시고 함께 기뻐해 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건강검진을 하실 때마다 약간의 이상 징후들이 발견됐어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기에 이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물론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계시는 부모님을 모시는 자녀들도 많겠지만, 우리 부모님의 상황은 한없이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어머니께서 앞으로 혈압약을 꾸준히 복용하셔야 한다는 소식이 그렇게 가슴 아플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심적으로 버거울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저 옆에 있는 것뿐이라는 것이 한스럽다.
다 잘 될 것이다. 우리 가족은 앞으로도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 것이다. 오래도록 그 행복 만끽하다 이별할 것이다. 지난해부터 지겹도록 되새기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불효자가 됐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요즘이다. 울기라도 한다면 이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을까? 그렇지만 울 용기도 나지 않는다. 아니, 울 자격조차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과연 뭘까? 기민했던 과거에는 막막할 때마다 돌파구가 번뜩였는데, 지금은 한없이 짙은 어둠 안에 갇힌 기분이다. 거북할 만큼 무기력으로 가득하다. 일생에서 이렇게 자존감이 낮아졌던 적이 있었던가. 0 이하로 떨어져 본 기억이 없었는데, 지금은 무한한 마이너스로 향하고 있다.
불효자가 바라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희망해본다. 극적으로 V자 반등을 이끌어줄 일생일대의 계기가 찾아오길. 찬란한 한 줄기 빛이 늘어진 내 어깨를 따스히 적셔주길. 그 힘으로 주저앉았던 짧지 않았던 이 시기를 다 잊을 만한 웃음꽃을 손에 쥘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