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라비안의 해를 마주어 보며, 빛나는 흰 돌이 가득한 수많은 계곡을 품은 시에라네바다 산맥.
낭만적인 더운 나라에서의 삶을 소개할 때 나올 법한 산맥이 배경인 이곳에 살지만, 그저 기쁘지만은 않다.
삶이 엉키고 풀리고 하는 과정에 떠밀려 어쩌다가 여기에 있는 것 같은 언짢은 느낌 때문이다.
아무리 도덕책에서 나올법한 가치관으로 포장을 해봐도, 가만히 있다가도 문뜩 불안감은 어디서 인가부터 스멀스멀 올라온다.
글을 쓰는 이유도, 내가 여기 존재해도 괜찮다는 것을 증명해보고자 하는 발버둥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저 지금 치는 수많은 발버둥들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걷어차지 않았으면 하면 바람이다.
이 불편한 감정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려면 몇 번의 전생은 거쳐야 할 것 같아, 오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어젯밤 꿈을 상기시켰다. 숨이 벅차오를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목이 뒤로 젖혀진 채로 잠에서 깨어난 탓에 꿈에서 본 장면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맥 사이로 피어난 아름다운 호수를 보았다. 호수가 하도 빛나고 성스러워 보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꿈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호수 안에는 생명이 깃들은 붉은 오로라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붉은 오로라는 알 수 없는 물체로 변하여, 결국에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꿈의 형상이 흩어지자 시에라네바다 산맥에는 만년설로 덮인 유명한 산봉우리들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곳 원주민에게 가장 영적인 장소로 여기지는 곳들이다. 가보지도 않은 곳을 꿈에서 보았는지, 아니면 나의 마음속에 헤엄치는 무언가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감정은 불쑥불쑥 예고 없이 찾아온다. 가끔, 그저 가만히 앉아있는데, 나를 둘러싼 세상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든다. 그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회용돌이에 빨려 삼켜지듯이 고요하게 사라지듯이. 그러곤 용암이 내 마음 한가운데에서 흘러나온다. 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려다 지쳐 다시금 서글퍼진다.
하지만, 그가 말했다. 사실 회용돌이 안에서 가장 고요한 곳은 그 정중앙, 회용돌이의 눈이라고. 내가 아는 세상이 무너지고 휩싸여 삼켜지는 동안 여태껏 그래 왔었던 것처럼 그저 바라만 보아도 괜찮다고.
나에게는 이제 그 회용돌이의 정중앙에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어쩌면,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내가 거친 회용돌이를 피해 그녀의 호수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해주고 있던것이 아닐까 꿈이 지나간 자리에 앉아서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 이제는 너무 많이 생각을 해서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내린 오늘의 선택도 이곳에 머무는 것이다. 이전에는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는 용기에 의지했는데, 지금은 머무를 수 있을 때 머무르는 용기를 내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중에서는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대반이다. 이를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이는 게 마음이 편하다. 내가 콜롬비아 산맥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유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알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 오히려 나치판이 될 때도 있다. 내가 생각이 아닌 마음을 따라왔다는 증표이니.
결단력이 떨어지면 좋은 이유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니 마음을 따라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