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남의 이야기 같다. 나의 집, 사실 아직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의 축이 한국에서 보낸 시간보다 길다. 돌이켜보면 나는 집을 찾으러 집을 나갔다 보다.
지난 두 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한 여름밤의 꿈. 신비로웠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팔로미오의 집은 떠나기 전보다도 더 온전하게 같은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높은 산맥의 구름과 우거진 정글 사이를 누비고 다시 본 위치에 돌아온 나의 마음도 그전보다 더 온전하게 빛나고 있었다. 깊은 바닷속 진주처럼. 영롱하게, 찬란하게.
여정의 시작은 엄마와 함께하였다. 엄마와의 동행 내내 따듯한 온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엄마보다 더 감사한 존재가 있을까.
부끄러워 전하지 못한 말이지만, 글이라도 적어본다.
머나먼 이곳까지 딸내미 보러 와준 엄마, 고마워.
용기 내어 주어 고마워.
건강해주어 고마워.
나를 있는 그 자체로 수용해 주어 고마워.
따듯한 엄마의 마음으로 나를 포옹해 주어 고마워.
고요하게 내 옆을 지켜주어 고마워.
고마워, 또 고마워.
오랜 외국 생활에서 가장 그리운 것이 첫 번째로 엄마이고, 둘째로는 모국의 음식이다. 이번 아마존 정글에서의 디에타(스페인어로 Dieta, 정해진 약초나 과일을 복용하며 아야와스카 의식을 정해진 기간동안 수행하는 문화)는 한국에서 온 친구 J와 함께하였다. 디에타를 하면서 소금을 제외한 아주 한정적인 식단을 지켜야 하는데, 그녀와 나눈 각종 양념과 요리 이야기는 굶주리고 있는 우리에게 야속하게도 침을 몇 번이나 꼴깍꼴깍 삼키게 하였다. 자기 전에 해먹에 누워있으면 낮에 이야기하였던 음식이 눈앞에 몇 번이나 그려져 나를 방해하기 일쑤였다.
나의 배고픔과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은 친구였다. 대자연에서 친구와 함께 있는 것 자체만으로 정화고, 의식이었다. 오랜 타지생활을 한 나에게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해소가 되었으며, 올라오는 느낌을 더 생생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같은 의미의 단어라도 배운 언어로 말하는 것과 모국어로 말하는 것이 그 울림과 파장이 다르다. 쾌쾌한 캐비닛에다 묵어두었던 깊은 무언가와의 연결고리를 조심스레 꺼내어 닦아준 것처럼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페루의 정글과 안데스 산맥,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멕시코시티와 치아파스 고지대를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 팔로미노는 나를 맞이해 주었다. 걷잡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지역과 추억으로로 구분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