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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Jan 24. 2023

비밀의 방


나는 비밀을 좋아하고 아주 잘 지킨다. 그런 나의 집에는 비밀의 방이 있다. 그 방은 은유가 아닌 실존하는 방이다. 비밀 따위는 품을 리 없어 보이는 큰 창문이 나있고, 방의 양쪽 귀퉁이에는 책상 두 개가 깊이 뿌리내려 있다. 등을 덥혀주는 난로 하나 외에는 텅 빈 방이다. 오른쪽 구석 책상은 남편의 책상이다. 큰 모니터와 각종 전공 서적들, 열쇠로 열어야 열리는 사물함들. 그의 책상 위에는 불친절한 고지서들과 꼬리가 긴 숫자들이 암호처럼 섞여 있다. 대부분의 서랍들은 자물쇠로 잠겨져 있고 읽어봐도 모를 난해한 문장의 문서들이기에 정말 중요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을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중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다. (내 눈에는) 훔쳐가도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왜 자물쇠를 걸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이 집안의 모든 비밀을 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은 실은 왼쪽 구석에 붙은 나의 책상에 있다. 이곳이 바로 이 비밀의 방이 품고 있는 비밀의 섬이다. 신기하게도 이곳에는 아무런 자물쇠나 열쇠, 암호나 코드도 없다. 비밀의 섬이 비밀인 이유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값진 보물을 품고 있어서인데, 보통 그 보물을 찾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한 법이다. 한데 그 보물지도는 함정인가 싶을 정도로 대놓고 책상 앞에 보란 듯이 붙어있다.


이 방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나는 비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잉태되기까지 사수하는데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웬만해서는 발설하는 일이 없고, "이건 비밀인데 말해주는 거야"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뜸이 들기 전 밥솥을 열어 보지 않듯. 해산하기 전 태아를 재촉하지 않듯. 비밀은 무르익어야 하고, 갈망되어져야 한다.


이 방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고는 하지만, 실은 늘 열려있다. 큰 비밀일수록 일상의 매일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법이다. 매일 열려 있지만, 아무도 가서 앉지 않는 그 자리. 그 자리는 새벽마다 나를 부른다. 졸음을 뿌리치며 가 앉으면, 벽에 지도처럼 붙어 있는 약속들은 숲 속에 길을 내듯 내게 따라오라 말한다. 그렇다. 실은 그 비밀이란 약속들을 뜻한다.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그 비밀을 알아차릴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각자만 알아들을 수 있게 속삭여진 약속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약속이 있다. 일종의 부당한 계약이랄까. 이 계약은 내가 더디어도, 망해 자빠져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때로는 도망을 쳐도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다. 원금을 재촉하거나 피를 말리는 이자를 묻지 않는다. 대신 그 약속은 내 안에 어마어마한 유산이 있다는 비밀을 지치지도 않고 상기시킨다.


그중 하나의 비밀을 풀어보자면 이렇다. 나는 최근 마음이 중풍병자 같았다. 저어기 한 발자국만 일어나 가보았으면 좋겠는데 몸의 어느 곳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딱 저만큼만 가면 될 것 같은데,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철퍼덕 주저 않아 버렸다. 진흙탕에서 힘겹게 한 발을 빼면 다른 한 발이 더 깊이 빠지는 느낌. 때로는, 만삭인데 출산하지 못하는 여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는 남산만큼 불러와 숨은 헐떡이는데 아기는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태동은 나날이 강해지나 산도는 열리지 않아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기분이었다. ‘힘을 주고 싶지 않다.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힘을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러다 품고 있는 아이를 잃어버릴 거 같다’는 종류의 두려움. 이런 와중에 그 비밀의 언약은 나의 막혀버린 산도에 깃발을 꽂았다.
 “너는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만국의 어미가 될 거야.”

만국의 어미? 지금 하나도 죽이게 생겼는데, 셀 수 없는 자손이 생길 거라구요?

헛웃음이 나지만 그 비밀을 붙잡는다. 그리고 사수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꾸만 거절을 받아도, 나는 약속을 잉태한 자니까. 나는 그 비밀을 아는 자니까.

이곳에서의 시간은 진짜 내가 형성되는 시간이다. 열 달을 채워야 아기가 태어나듯 절대적인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이곳에서는 내가 스무 살이건, 마흔 살이건, 여든 살이건 상관이 없다.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결핍과 앞날의 불안이 빚어가는 껍데기 같은 나를 벗어 놓고, 내 안의 원본을 만나는 시간. 그곳에서 나는 사랑에 떨고 경고를 받고 약속을 만나고 두려움을 대면을 하기도 한다. 모두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는 시간이다. 나는 이 비밀의 방 안에서 울고, 쓰고, 몸부림을 치고, 졸기도 하고, 빼앗긴 마음을 되찾아 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길을 보여준다. 이것은 무언가를 열심히 노력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는 개념이 아닌, 무너진 마음.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 다 타버려 남아 있지 않는 마음.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신기하게도 길이 나 있다. 세상에 그런 약속은 이루어질 리 없다고 속으로 비웃던 늙은 사라가 결국은 해산을 했듯 말이다.


나는 오늘도, 몹시 부당하고 훌륭한 비밀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방 왼쪽에 뿌리내린 책상에서 명백한 지도를 따라 겁 없는 항해를 시작한다.


“The King has brought me into his chambers. We will be glad and rejoice in you. We will remember Your love more than wine.”
(Song 1:4)


• Soli Del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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