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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Apr 19. 2023

포기하는 자와 해산하는 자

# 3 불임 같고, 흉년 같은 삶이라면


서른셋의 은서는 한 달의 한 번 정도 엄마의 집에 간다. 십 대 시절에는 엄마와 떨어져 살 수밖에 없던 가정환경이었고, 이십 대에는 학교와 회사 기숙사에 살았는데, 삼십 대가 된 지금에 와서야 마음만 먹으면 엄마를 볼 수 있는 거리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떨어져 사는 게 더 익숙해진 지금은 엄마가 지척에 살아도 한 달에 한 번 마음을 먹고 의지를 내야 엄마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엄마와 사이가 나쁘다던가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그저, 혼자가 편하기도 했고 혼자 모든 걸 감내하고 싶었다.


사실 이번에는 석 달 만에 엄마 집에 왔다. 맞지 않는 전공으로 대학원에서 공부하다 결국은 중도 포기를 하고 회사에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매일 아침 고민스러웠다. 회사에 다니며 벌써 두 번이나 겪은 유산은 은서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엄마가 되는 것도 포기하고 싶고, 이러다 결혼생활까지 포기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를 볼 수 없었다. 엄마는 괜찮다고 할 테지만 나는 괜찮지 않으니까. 


오랜만인데도 엄마는 별달리 물어보는 것이 없었다. 힘내라는 듯 화려한 밥상을 차려주지도, 한숨 자라고 이불을 펴주지도 않았다. 그저 엄마는 엄마의 일상을 살고 있었고, 이상하게 그것이 은서에게 힘이 되었다. “은서 왔니?” 하고 내다보고는 향긋한 유자차와 폭신한 인절미를 내주었다. 엄마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얼까. 엄마는 ‘기다림’이었다. 엄마는 항상 재촉하지 않고 자리를 내어 주었다. 

은서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고 엄마가 덮어 놓았던 책을 집어 읽다가 문득 말했다.

“이렇게 오래 노력해도 안 되면 불임 맞대.” 

“그래?” 

“응.. 근데 엄마. 그거 알아? 난 내 인생 자체가 불임 같아.

“인생… 자체가… 불임…”

엄마는 빨래를 개다 말고 공중에 부유하는 은서의 말을 소중히 모으기라도 하듯 천천히 되뇌었다. 


“엄마.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엄마 딸이 되게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잖아. 은서는 특별하다고. 쟤는 뭐를 해도 해낼 아이라고. 어떻게 딸을 저렇게 잘 키웠냐고. 그럴 때마다 난 엄마 얼굴을 보는 게 좋았어. 사람들이 엄마를 은서 엄마라고 부르는 걸 듣는 게 좋았어. 내가 엄마 삶에 큰 약속이 되는 거 같았거든. 엄마의 살아보지 못한 미래를 내가 꼭 잘 살아내야지, 항상 자신만만했었는데… 


근데 엄마. 그 많은 약속을 받으면 뭐 해? 아무것도 안 이루어졌잖아. 난 평생 열심히 살지 않았던 적이 없는데… 내 인생은 뭐랄까. 잉태되지 못한 약속의 집합소. 다 유산되어 버린 꿈들의 소각장. 온통 불임이 돼버린 삶 같아.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는 인생인 거야? 사람들은 겉만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지금 안으로 죽게 생겼는데. 그 많던 약속들이 다 무슨 소용이야? 엄마. 엄마 딸은 결국 그 꿈들이 다 태어나기도 전에 유산해버리고 마는 인생인데… 그래도 괜찮아?”


원망인지 절망인지 모를 화살촉 같은 말들을 쏟아 내었지만, 엄마는 잠잠히 은서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그 공기 안에 머물렀다. 엄마가 산 같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은서가 어떤 말들 - 때로는 과하고 오버스러운 - 을 쏟아낸들, 엄마는 얘가 왜 이러냐고 호들갑을 떨지도, 원인을 추궁하지도, 해답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엄마는 빈 공책처럼 은서의 모든 말을 받아주었다. 


“은서야… 네가 잘하고 싶구나. 지금 네 인생이 흉년 같다고 느끼는구나. 하지만 네 인생은 불임도, 흉년도 아니야. 하지만 네가 왜 그렇게 잘하고 싶은지, 무엇을 그렇게 해내고 싶은지 네 마음의 진심을 들여다보는 건 중요해. 불임과 흉년은 내가 영광 받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 아닐까? 결국은 내 뜻대로 하고 싶고, 내 영향력이 커졌으면 좋겠는데 세상은 그렇게 되지 않잖아. 

후회 없는 인생이라는 게 있을까? 우리는 정답을 알 수 없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우리 인생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문제들 - 예를 들어, 네가 말한 ‘자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나 불임 같은 상황들' - 은 반복이 되는 이유가 있다는 거야. 우리가 수학 문제를 풀 때도 그렇잖아. 이 단원에서 꼭 배우고 넘어가야 하는 개념이 있는데 계속 틀리면, 선생님은 우리가 그 개념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동일한 패턴의 문제들을 계속 풀게 하시지. 왜냐하면 이걸 꼭 배우고 넘어가야 다음 단원을 풀 수 있어서 그래. 그와 같이, 우리 인생에 반복되는 문제의 패턴을 분별하고 배우고 넘어가는 게 중요해. 


네가 하는 말을 들으며 엄마가 하나 분별한 게 있다면 이거야. 은서 너는 네가 받은 약속들이 있다고 했지? 그럼, 그 약속을 너의 부정적인 언어로 사산시키고 취소시키면 안 돼. 너의 말에는 실제적인 힘이 있어. 네 배 속에 아이를 품고 있다고 한다면 너는 그 아이에게, ‘네가 정말 나오긴 하겠니? 너 혹시 벌써 죽은 건 아니니?’라고 말하진 않을 거야. 너는 그 아이에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과 응원의 말을 해주겠지. 너는 할 수 있다고. 우리 꼭 만나자고. 나는 너를 꼭 품에 안을 거라고. 


은서야, 네가 해산할 때, 엄마가 옆에 있어 줄게. 너의 모든 꿈과 약속을 엄마가 함께 받아줄게. 너는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야. 너는 약속을 잉태한 사람이고, 그것을 끝끝내 낳아 키울 사람이야. 그리고 있잖아, 잘하고 싶은 마음. 탁월해지고 싶은 갈망은 잘못된 게 아니야. 그런 마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불임과 흉년의 시즌을 지나 꼭 네가 가야 할 길을 가게 될 거야.”


은서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모르게 스르륵 잠이 왔다. 울고불고 뒤집어엎고 싶던 마음이 사라지고 안심이 되니 잠이 쏟아졌다. “알았어 엄마. 그 수학 문제 한번 잘 풀어볼게... 근데 나 일어나면 배고플 거 같아"하고 사랑받는 아이의 어리광 같은 요구를 하고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고 나면 엄마의 밥상이 차려져 있을 것이다. '배부르게 먹고 다시 힘내야지', 은서는 생각했다. 


• Soli Deo Gloria •



*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이윤승 님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레퍼런서의 글>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원 제목은 <관계라는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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