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어주는 회사에게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면
지금은 코로나의 영향으로 하이브리드 근무 혹은 유연하게 회사 근무/재택근무를 하고 있지만, 이는 코로나 이전에도 나에게 익숙한 근무 형태였다.
코로나 전의 상황은 대략 이러했다. 참고로 이것은 최근 이직하기 전 직장의 이야기이다.
당시 우리 회사는 일찍 출근하면 일찍 퇴근하고, 늦게 출근하면 늦게 퇴근하는 등 따로 출퇴근 시간은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8시 반~9시 반 정도에 출근하는 편이었다면 매니저는 9시 반~10시 반 정도에 출근을 해서 내가 늘 먼저 퇴근을 하곤 했다. 처음에 왔을 때에도 “내일 몇 시까지 출근하면 좋을까?”라는 나의 질문에 “네가 몇 시까지 오고 싶은데?”라고 다시 나에게 질문을 하는 등 딱히 출근 시간을 정해주지 않았었던 기억이 있다. 합리적인 범위에서는 자율권을 주는 셈이다.
병원을 가야 하거나 가족 관련 등 개인 사정이 있으면 개인 연차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당연히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한다. 물론 저녁 이후에 다시 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것을 누군가 따로 확인하지는 않는다. 특이하다고 느낀 것은 아이나 병원 관련 이외에도, 가령 택배를 받아야 하는 경우에도 그날은 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는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많고 관리실이 따로 없어서 집 밖에 택배가 배달되면 간혹 훔쳐가는 경우가 있어 그런 듯하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재택근무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적도 있었다. 예전에 부모님께서 잠깐 미국에 놀러 오셨을 때 금요일 오후에는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반차를 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나: 부모님이 오셔서 그러는데 시스템에서 반차 내는 방법을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매니저: 걱정하지 마 (Don’t worry about it). 그냥 일할만큼 일하다가 부모님과 즐거운 시간 보내.
나:!!!?
매니저는 하루 중에 조금이라도 일을 하면 그것은 휴가가 아니라며, 휴가는 일에서 완전히 로그아웃한 상황에서만 사용하라고도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한 근무형태이지만 처음에 왔을 때에는 이런 문화가 상당히 낯설었다. 한때 한국에서 분 단위로 근태를 관리하는 회사에 다녔던 나로서는 이러한 자유로움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다시 나의 업무 시간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되물어보면 이곳에서 지내면서 나는 상당히 Spoiled 된 것이 사실이다.
여기까지 들어보면 마치 이곳은 꿈의 직장인 것 같다.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근태를 확인하는 사람도 없다니!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그리고 실리콘밸리라고 모두 이런 근무환경인 것은 아니고, 나도 꽤 운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절대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유연한 근무환경에는 아주 큰 책임감이 따른다는 것이다. 회사에 오래 앉아 있는다고 해서 그것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일단 성과로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근무 환경은 유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야 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에, 하지 못한 일을 저녁이나 주말에 따로 하는 일이 발생하고, 따라서 근무시간에 쉰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미국, 특히 내가 일하는 캘리포니아는 한국과는 다른 노동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내가 업무 성과가 없거나 적으면 언제든지 회사에서는 "at will"로 직원을 해고시킬 수 있다 (주마다 이러한 법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지만 정규직을 해고하는 것은 한국보다 훨씬 쉬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실제로 함께 일하던 동료가 가차 없이 해고된 것을 가까이에서 본 적도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한국에서 일하던 것보다 훨씬 큰 압박감을 느끼며 일을 하고 있고, 일이 없거나 적으면 걱정이 되는 것은 물론 나의 일을 찾아서 계속 나의 업무 범위 (scope)를 넓혀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늘 안고 있다. 정규직이지만 마치 계약직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나는 이러한 근무 형태에 대해 익숙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한국에서는 해고의 두려움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 지냈다면, 여기서는 끊임없이 나를 평가하는 느낌이 들었고 - 실제로 계속 평가를 하고 있다 - , 그에 따른 번아웃 (Burn-out)도 같이 오기도 했다. 특히 업무의 퍼포먼스 이외에도 사방에서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일하는 모든 동료들과도 늘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 있기도 했다.
지금은 몇 년이 흘러 업무도 익숙해지고 매니저와 및 동료들에게 신뢰가 쌓인 상태라 이러한 스트레스는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글을 처음 적을 때만 해도 전 직장에서 근무 중이었던지라,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는 줄어들어있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최근에 이직을 했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팀과 업무에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훈련이 되어 나의 업무 효율성 및 업무 능력이 함께 증가한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회사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자율성은 주는 것은 업무를 더 잘할 수 있게 지원하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페이스대로 일을 하도록 맡겨주고, 철저히 성과로만 평가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조금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문화이지만, 나를 하나의 개인으로 존중해 주는 느낌이 들어서 이러한 문화가 나에게는 조금 더 맞는 것 같다.
여의도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즐거운 기억이 너무나 많았던 시절이기도 하지만 간혹 휴게실에서 창문 밖 여의도 공원을 바라보며 나는 마치 닭장에 갇힌 닭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창 밖의 멋진 풍경을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던, 사실상 허락 없이 회사 밖을 나가지 못하는 회사에 메여 있던 생활. 시간에 맞추어 매일 거의 같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어찌 보면 조금 획일화된 생활. 언젠가 이 생활이 끝날 수 있을까 긴 터널과 같은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이러한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가중되는 업무가 가끔은 버겁고, 지금은 특히 코로나로 인한 장기 재택근무로 일과 삶의 경계가 조금은 무너진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의 근무 환경에 무척 만족하고 감사하다. 특히 이러한 환경이 나의 업무 능력을 최대치로 이끌어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한다고 다 나와 같은 근무환경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곳은 한국 기업과는 전혀 다른 문화가 지배적임은 틀림없다. 두 문화를 다 겪어본 바로는 어떤 특정 문화가 절대적으로 더 낫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또한 코로나 이후의 한국의 근무 문화와 형태도 많이 달라졌다고 이야기 들었다. 다른 편에서 조금 더 자세히 적을 기회가 있겠지만 한국에서의 문화는 일을 처음 배움에 있어서, 그리고 소속감이 생기는 것에 있어서는 훌륭한 문화가 많이 존재한다. 두 문화에 모두 애정이 있는 직장인으로서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회사에서 구성원 개개인들의 업무 능력이 최대가 되는 문화로 발전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것이 진정 구성원들과 회사의 윈윈 (Win-Win)이 되는 시스템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