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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킴 May 18. 2021

엄마는 그날 뒤돌아 춤을 추었다

바랜 추억 속 엄마를 그리며




내 어릴 적의 풍경


이제 오십인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왠지 나보다는 좀 더 나이 든 사람의 그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 고향이 저 땅끝마을 외진 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모든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오던 날들을 상당히 생생히 기억한다. 호롱불에서 남포불(램프)을 거쳐 백열 전구가 들어오던 날, ‘팟’ 소리와 함께 어둡던 방안이 대명천지처럼 밝아지던 풍경이 그림처럼 내 기억 속에 박혀 있다. 그 이듬해 여름에는 학교에 갔다 왔더니 초록색 날개를 가진 선풍기가 우리 집에 처음으로 입성을 해서 대청마루에 위풍 당당하게 서 있었다. 나는 밭일을 하고 돌아오신 할머니를 선풍기 앞으로 이끌고 가서 선풍기 바람을 쐬게 해드렸다. 땀으로 범벅이셨던 할머니의 얼굴에 피어나던 놀라운 표정은 어제처럼 눈 앞에 선연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요즘은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추억 중 하나는 학교 봄 운동회와 연결되어 있다.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운동회는 일년에 두 차례가 열렸다. 하나는 가을 운동회로 전교생이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힘 겨루기를 하는 교내 행사였고, 나머지 하나는 봄철 어버이날 즈음에 열렸던 봄 운동회로 일종의 ‘마을 대항전’이었다.


바쁜 모내기철을 지내고 밭일을 하던 어른들도 봄 운동회날 만큼은 잠깐의 짬을 냈다. 그 날은 아이들이 만들어준 천으로 된 카네이션을 왼쪽 가슴에 단 어른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모두 함께 즐기는 마을 잔칫날이었다.


가을 운동회 때는 전교생들이 '청군, 백군'으로 나뉘었다면 봄 운동회 때는‘마을 별’로 나뉘어서 힘겨루기를 했다. 우리는 흰색 셔츠와 고무줄 바지처럼 생긴 체육복을 입고서, 각자 마을의 이름이 적힌 푯말 뒤에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선생님들의 지휘 아래 달리기 등 여러가지 경기를 치렀다. 우승팀에는 트로피가 주어졌다.


이 봄 운동회에서는 학교에서 4km 정도 거리에 있는 '학교에서 가장 먼 우리 마을'과, '학교가 위치한 마을'의 대항전이 늘 볼거리였다. 이상하게도 공부와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은 이 두 마을에서 나왔는데,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내세운 어른들의 기싸움과 신경전은 상당했다. 부모님들의 자존심 싸움은 한참 어렸던 우리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우리는 어떻게든 우승을 하려고 기를 썼다. 릴레이 달리기 같은 경우 치열한(?) 머리 싸움으로 선수들을 배치했고, 바통 이어받기 연습에도 매우 진지하게 임했다.  


특히 운동회의 백미였던 줄다리기를 할 때는 땅바닥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한 우리를 ‘으쌰! 으쌰!’ 박자를 맞추어 응원하려고 마을 어른들이 운동장 한가운데까지 뛰쳐나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다른 경기에서는 다 져도 이 줄다리기에서만은 꼭 이겨야만 했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던 줄다리기가 한쪽으로 쏠려 판가름이 나면 큰 함성과 함께 어른들의 얼굴에 퍼지던 하얀 웃음이 그립다.  





엄마가 신이 났던 단 하루


운동회에 대한 추억중의 제일은 뭐니 뭐니 해도 맛있는 점심밥이었다. 당시 한복은 우리 엄마들이 준비할 수 있는 가장 깨끗한 옷이었던 것 같다. 하나같이 죄다 한복을 차려 입은 우리 엄마들은 운동회 날이 다가오면 그 전날부터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윤기 흐르는 흰밥을 비롯 미나리와 오징어를 함께 무친 오징어 무침, 낙지 볶음, 생선 조림 그리고 삶은 계란 등 평상시에 먹지 못하는 산해진미로 쇠로 만든 큼지막한 함지박을 가득 채웠다. 도다리를 넣어 끓인 미역국은 동네 차원에서 함께 만들어 들통에 나눠 담겼다.


몇몇 힘 좋은 젊은 아빠들이 그 들통을 지게에 나눠 지고 십리길을 앞장서면, 그 뒤로 함지박을 머리에 인 엄마들이 이야기 꽃을 피우며 걸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각자의 엄마가 만든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벌써부터 점심 시간을 고대하며 깡충거리며 한껏 신이 났었다.


시상식을 마지막으로 운동회가 끝이 나면, 그때부터는 엄마들의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배불리 먹인 것으로 소임을 다한 엄마들은 그제서야 마음을 풀어 놓을 수 있었다. 거의 비어 버린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저씨들이 건네 준 막걸리 한잔에 발그레 물이 든 엄마들의 노랫소리로 노을 졌다.


그렇게 전초전(?)으로 목을 푼 엄마들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마을 회관으로 모여 들었다. 동네에 딱 하나 있는 구멍 가게에서 산 막걸리를 마시며 둥그렇게 모여 서서 누군가 노래를 선창하면, 다들 그 노래를 함께 부르며 한복 입은 팔을 움직여 멋들어지게 춤을 추곤 했다.    




내 초등학교 4학년 어버이날 기념 운동회 날. 그날도 마을회관에서 어김없이 엄마들의 흥겨운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엄마를 다급하게 불렀다. 다른 엄마들과 섞여 노래를 부르며 흥이 나 있던 엄마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셨다.


나는 이내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관심을 끌려고 했는데, 엄마는 그것이 매우 귀찮으셨던 모양이다. 특유의 엄한 눈초리로, 집이나 어디 다른 곳으로 가라고 눈치를 주셨다. 그리고는 곧장 돌아서서 노래와 춤에 흠뻑 취하셨다. 


어린 마음에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하고 돌아서면서 서운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 시간이 엄마에게 얼마나 꿀처럼 달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당시에 서운했건 말건, 그 날 엄마가 마음껏 즐기셨다는 것이 지금은 위로가 된다. 그때 엄마는 지금의 나와 비슷하게 오십을 바라보고 있던 나이였다.


그 봄 운동회 날은 일곱 남매의 대식구를 먹여 살리느라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던 그 시절, 일 년에 단 하루, 그것도 저녁 나절이 되어서야 허락된 ‘김화자’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칠남매를 돌보며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일상이 얼마나 고단하셨을까? 자신의 인생을 고스란히 내어 놓도록 종용하는 현실 속에서 ‘김화자’라는 사람은 얼마나 도망가고 싶었을까? 그날, 엄마는 귀애하는 막내딸의 요구에도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며, 잠시 잠깐이지만 모든 의무와 책임을 벗어나 자유롭게 노니셨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노지는 못하리에라 차차차 (차차차).


<노랫가락 차차차> 박자에 심취해 어깨춤을 추던 엄마의 모습. 분명 노랫 가락 흥겨웁고, 엄마의 어깨춤도 신명이 났었는데, 그날의 엄마의 모습은 먹먹함으로 떠오른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혀 노래를 부르던 엄마의 얼굴, 그 얼굴에서 자신을 몽땅 희생한 삶의 회한을 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덧 오십 고개에 이르러 여전히 끝도 보이지 않는 ‘엄마’, ‘며느리’, 그리고 ‘아내’로서의 삶이 얼마나 무겁게 다가왔을까? 고단함과 시름으로 얼룩진 길 위에서 잠시 쉬는 그 찰나의 시간이 엄마는 얼마나 아련했을까? 가는 세월, 스러져 가는 인생이 얼마나 아까우셨을까?


이후에 마을에 ‘계 모임’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엄마가 친구분들과 놀 수 있는 날이 조금이라도 늘었고,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마을 어른들끼리 혹은 계모임에서 일년에 한 두 차례 짧은 ‘여행’을 다니실 수도 있게 되었다. 막내였던 내가 엄마의 보살핌을 덜 필요로 하는 나이가 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의 시간은 얼마나 부족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우리가 효도 여행을 보내 드릴 나이가 되고 나서는 이미 엄마의 몸은 많이 쇠약해져 계셨다.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의 일생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리다.




하고싶은 건 하는 엄마 되기



얼마 전, 친구와 단 둘이 트램핑을 다녀왔다. 시현이와 시후 둘이서 3박 4일 간 집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며칠 전에 시간이 나서 여행 사진들과 영상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시현이가 옆에서 그 영상들을 보더니 대뜸 랩을 시작했다. 대충 번역하자면 이런 말들이었다.  


우리 엄마 트램핑 가셨어.
우리 놓고 혼자 가셨어.
우리는 엄마 여행의 방해물. Yo!

우리 걱정은 안 되나 봐.
카약 타는 우리 엄마 행복해 보여.
Yeah! 좋아! I like it!’


손 마이크를 들고 박자를 맞춰 춤을 추는 아이 때문에 한참을 배꼽 빠지게 웃었다.


때로는 혼자 있고 싶은 욕구가 아이들에 의해 방해받을 때, 많이 귀찮아 했던 내 모습을 꼬집는 것 같아서 속으로 뜨끔하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가 행복해 보이는 것이 좋다고 한 말에 더 무게감을 싣기로 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다 털어 버렸다. 뭐 아이가 그게 좋다고 하지 않는가?  


어느 덧, 내 이마 미간에도 길게 한 줄 주름이 깊어져 간다. 유튜브를 켜고 다시 들어보는 옛 기억 속 봄운동회 날의 그 노래, <노랫가락 차차차>의 리듬이 애잔하기만 한 것은 그 가사에 실은 내 엄마의 애달픈 마음을 내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취미가 무엇이었을까? 젊은 시절에 꿈꾸었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그 책임감이 그토록 가혹하지 않았다면 엄마는 어떤 일을 정말로 하고 싶으셨을까?


이 모든 질문이 사치스럽게 여겨졌을 당시의 엄마의 삶의 무게 앞에 그저 할말을 잃는다.


나 역시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하지 못한 일들이 많다. 이제 아이들이 커간다. 죽을 때까지 놓을 수 없는 엄마 역할이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내 엄마가 자신의 삶을 태워 내게 주고자 했던 ‘김효정의 삶’에 애정을 더 쏟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꿈을 이루어 가는 인생. 그것이 엄마라는 이름에 묻혀버린 ‘김화자’ 여사의 삶이 내게 남긴 유일한 유산임을 알겠다.


온 몸으로 자식들의 인생을 들어올린 엄마의 삶의 선택이 빛이 나도록, 좀 더 힘을 내야겠다. 비록 내 몸 곳곳 근육이 빠진 자리에 주름들이 자글자글할지라도, 아직 늦지 않았다. 늘어진 근육을 활기로 다시 채워 넣고, 인생 끝까지 ‘나의 삶’을 추구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멀리 했던 ‘800km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꿈’을 머지 않은 미래로 다시 당겨오고, 시들해진 ‘하프 마라톤 연습’에 다시 열심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엄마의 꿈을 이루는 일이고, 먼 훗날에 나를 추억할 아이들에게 주는 또 하나의 유산이 될 것이기에.







<사진 출처 : http://m.maybugs.com/news/articleView.html?idxno=711829, https://www.korea.kr/special/policyFocusView.do?newsId=148800290&pkgId=495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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