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자연 속을 누비는 뉴질랜드의 장거리 트랙킹에서 배낭을 잘 싸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트랙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은 온통 자연 뿐, 며칠이 소요되는 코스 내에는 필요한 물품이나 음식을 살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다.며칠 간 먹을 물과 음식들까지도 처음부터 배낭 하나에 모두 챙겨가야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짊어지고 다녀야 할 배낭이 너무 무거워져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배낭에 넣을 품목 선정에 신중함을 기해야 한다.
작년에 밀포드(Milford)로 일주일 간의 트랙킹을 갔을 때, 나는 오로지 ‘마지막까지 잘 걷기’에만 집중했다. 매일 아침 다시 길을 떠날 때마다 짐을 싸야 했는데, 내게 짐싸기는 '걷기'와는 별 관련이 없는 귀찮고 부수적인 일로만 여겨졌다. 나는 매번 배낭에 넣을 물건들의 무게나 물건들을 넣는 순서 따위는 따지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짐을 쌌다.
그런데 본격적인 트랙킹 두번째 날, 허리와 어깨 벨트를 조였음에도 불구하고 배낭이 휘청거렸다. 어깨와 등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트랙킹에 경험이 많은 친구 클레어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녀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내 배낭을 모두 풀어 헤쳤다. 그리고 손수 배낭 싸는 법을 보여주며 내게 배낭 싸기의 '황금 룰'을 가르쳐 주었다.
일단 물품을 최대한 가볍게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낭에 짐을 싸는 것에도 노하우가 있다고 한다.
어깨 부근에 무거운 것을 놓게 되면 균형이 흐트러지고 어깨에 무리가 많이 가서 걸을 때 훨씬 더 힘이 많이 든다.
무거운 물건들은 배낭 맨 밑바닥에 넣어서, 배낭을 맸을 때 엉덩이 바로 윗부분에 걸쳐지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그래서 짐 중에서 가장 무거운 음식과 침낭이 배낭의 아래쪽에 위치하게 된다.
그녀가 내 짐을 싸주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게 무슨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그러나 다시 배낭을 짊어졌을 때, 그런 나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허리 부근의 짐들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배낭이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어깨와 등이 편안해지며 걸음걸이에 균형이 잡히는 것을 온 몸으로 알 수 있었다. 다음 날부터는 그 황금 룰을 꼭 지켰다.
하지만 여전히 짐을 싸는 일은 내겐 너무나 귀찮았기에, 다치지 않기 위해 무거운 것이 허리 부근에 오게 짐을 싸긴 했지만그 외의 짐들은 별 생각 없이 배낭에 쑤셔넣었다. 캠프사이트에 도착해 짐을 풀 때도 마찬가지였다. 맨 밑바닥의 침낭을 꺼내야 하니 일단 배낭 안의 모든 물건들을 다 꺼내어 놓았는데, 그 때문에 필요한 물품을 찾을 때면 아주 귀찮은 상황에 처했다.
정성을 들이면 달라진다
밀포드에서 하루는 한밤중에 너무 추워 모자를 찾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침대 주변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짐들 중에서 대체 모자가 어디 즈음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오밤 중에 부스럭거리며 비닐 백들을 죄다 뒤져야 했다. (나름대로 짐을 분류하려고 모든 물건들을 각각 다른 비닐 백에 넣어 갔다.) 같은 벙커 룸에서 자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것이다.
짐을 쌀 때도, 풀어 놓을 때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 피곤하더라도 항상 배낭과 짐을 잘 정리를 해 두어야 유사시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
내 두 번째 트랙킹은 3박 3일 간 뱅스 퍼닌슐라(Banks Peninsula)에서였다. 이번에는 친구 마미(Mami)와 동행을 했다. 뉴질랜드에서 30여 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장거리 트랙킹은 난생 처음인 그녀였기에, 비록 한 번의 경험이긴 하지만 트랙킹을 한 번 경험해본 선배로서 나는 그녀에게 준비물을 꼼꼼히 알려주고 배낭을 쌀 때의 주의할 점도 세세히 알려주었다.
그러나 트랙킹을 하면서, 나는 오히려 그녀의 짐 준비와 정리에서 나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를 보았다.
일단 마미는 식재료를 가져온 수준이 남달랐다. 깨소금이나 올리브 오일 같은 것들을 작은 용기에 따로 담아온 것 뿐 아니라, 와인도 비닐백에 담아 가져왔다. 혹 비닐백이 터질 경우에 대비해 작은 종이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와인이 담긴 비닐백을 넣어오기도 했다. 그녀의 꼼꼼한 준비 덕분에 단조로울 수 있는 트랙킹에서의 식사가 다양하고 맛있었다.
트랙킹 중간에 밤나무가 있는 곳을 지나며 밤을 주울 때는 그녀가 가져온 작은 손수건을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고, 덕분에 그날 저녁 우리는 밤을 맛있게 쪄 먹을 수 있었다. 펭귄과 물개 서식지에서 그녀는 작은 배낭 안에서 작은 쌍안경을 조용히 꺼내들며, 바다 저편을 보기 위해 미간에 주름을 모으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나를 기죽게(?) 하기도 했다.
챙겨온 물품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루어진 짐 정리에서도 마미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배낭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정리하며 찬찬히 시간을 보냈다. ‘뭘 저렇게까지 꼼꼼히 하나’ 싶을 정도였다.
배낭 싸기의 달인, '마미(Mami)'
일단 그녀의 짐 싸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그녀가 배낭 앞에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그 전과정을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내 마음이 즐거웠다.
배낭 아래로 들어가야 할 것이 한참 짐을 싸던 중에 발견되어도, 그녀는 이미 넣었던 물건들을 다시 꺼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자잘한 일들을 귀찮아 하는 나에게 그것은 경이롭게 보였다.
마미는 트랙킹이 끝나고 산장에서 짐을 풀 때마다 배낭의 물건들을 모두 꺼냈다. 그리고 그날 밤과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필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꺼내어 놓고, 나머지 물건들은 다시 배낭에 넣어 정리했다. 밀포드 트랙킹 때 한밤 중에 모자를 찾으며 사방에 널린 비닐 백을 부스럭거리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유별나게 깔끔한 잠자리를 내내 유지했다.
소소한 일상의 힘
이튿날부터는 나도 그 친구처럼 배낭을 풀고 다시 싸는 것에 좀 더 신경을 쓰기로 했다. 공을 들여 짐을 정리하고 그날의 트랙의 날씨나 상황도 미리 세심하게 챙겼다. 귀찮다고만 여기던 것이 정성을 들여 보니 생각보다 즐거웠고,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찬찬히 하다 보니 오히려 복잡한 마음이 정돈되고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트랙킹의 목적은 물론 걷기이다. 걷는다는 행위에 비교해 볼 때, 짐을 준비하는 것이나 배낭의 균형을 맞추는 일, 그리고 매일 아침과 저녁의 짐 정리는 작고 덜 중요해 보인다. 때로는 귀찮게도 생각된다. 그러나, 작은 것들에 정성을 들이고 신경을 썼을 때와, 그런 작은 것들을 무시하고 넘겼을 때 산행길에서 느끼는 쾌적함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인생길을 즐겁게 만드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전체적인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작고 소소한 것들이 오히려 매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즐겁게 걷는 것'일 테니 말이다.
특히나 큰 줄기를 잡느라 종종 작은 디테일을 놓치기도 하고, 간과하기도 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이 트랙킹 짐 싸기가 주는 가르침은 그 여운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