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그렇게 다른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는 늘 다른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에 큰 흥미를 느꼈다.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매료시켰다.
억겁의 인연으로 나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대면하게 된 사람들이 감지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너무나 궁금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내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렌즈를 얻는 것이다. 다양한 인생 속에 스며 있는 인간의 보편성과 독특성을 만날 때마다, 나의 삶은 더 다양한 빛깔로 더 생기 있게 빛난다.
이 매거진에는 내 가족, 친구들, 그리고 내가 이 곳 뉴질랜드에서 마주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평범하고 소박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내게는 큰 의미로 닿아 온 것들이다.
내 나이 오십, '인생'이라는 큰 숙제를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렌즈'를 선물해준 소중한 이야기를 담는다.
내가 웬디를 만난 때는 뉴질랜드에 온 첫 해였다. 한창 영어 회화에 열을 올리면서, 무료 수업을 찾아 다니고 있던 때였다. 한 커뮤니티 교실에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무료 영어 교실> 안내지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리가 가깝고 내 시간과 잘 들어 맞는 몇 곳을 표시했다. 그리고, 지역 도서관에서 열리는 한 영어 교실로 무작정 전화를 했다. 전화번호를 누르고 나서 신호음이 가는 동안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전화기를 들었다.
순간 당황한 나의 영어. 수업 장소와 시간을 확인하고 언제부터 그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묻는 그 단순한 질문들이 머릿속에서부터 엉키고 꼬였다. 내가 듣기에도 민망한 내 영어를 들은 전화선 반대쪽에서는 내 우려와는 달리 친절하고 인내심 넘치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나의 엉망 진창인 영어를 쓰다듬어 주는 듯한 그 친절함에 소위 쪽팔림이 사라지고, 그 영어 수업에 참여할 용기가 났다.
그렇게 나는 웬디와 먼저 전화로 만나고, 며칠 후 수업에서 직접 만나게 되었다.
웬디는 '크라이스트처치 이민자 모임(Christchurch New Comers’ Group - CNCG)'이라고 불리는 영어 교실의 코디네이터였다. 그 그룹에는 웬디 말고도 4~5명의 뉴질랜드 현지인 자원봉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업 시간이면 이민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영어 향상을 도왔다. 신입생인 나를 포함하여 모든 참석자들은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있었고, 수업 전에 각자 자기 소개를 했다. 이름도 국적도 각양 각색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모두들 부족하고 짧은 영어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열심히 참여했다. 현지인 봉사자들은 참석한 이민자들이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며 모임을 이끌어 갔다.
이 모임은 영어를 가르친다는 개념보다는 영어라는 언어를 매개체로 서로의 삶을 나누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다양한 주제를 놓고 정해진 틀없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토론의 형태였다.
한가지 규칙이 있다면, 몇몇 사람이 토론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아니라 참석자 모두가 고루 참여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는 것이었다. 영어 말하기를 하기 위해 모였기 때문에 이민자들은 반드시 대화에 참여해야 했고, 또 그렇게 하도록 배려되었다. 영어 실력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모두 듣고자 하는 마음과 끝까지 기다려주는 인내심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웬디의 태도는 단연 눈에 띄었다.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새로운 사람들을 반기고 편안하게 대했다. 삶을 통해 연마했을 것 같은 그녀의 편안함은 낯선 곳, 낯선 언어에 직면한 사람들의 긴장감을 해소해 주었다. 실수 투성이인 이민자들의 영어를 고쳐주려 하기 보다는, 실수를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이끌었다. 때로는 더 많이 실수하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늘 인간은 수많은 실수를 통해 배우는 존재임을 강조하곤 했다.
이런 그녀의 태도는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영어에 대해 느끼는 열등감을 무디게 하고,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말할 내용을 고르던 나의 초기의 버릇은 실수를 권장하는 웬디 덕분에 없어졌다. 언젠가부터는 할 말이 생각나면, 일단 입을 열고 떠오르는 대로 ‘영어를 던지게’ 되었다.
그녀는 여러 문화에서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다른 시각과 관점들을 아우르는데도 뛰어났다. 역사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특히 동아시아권에서 온 사람들과는 가끔 긴장스런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웬디는 ‘옳고 그름의 틀’을 뛰어넘어 공통적인 인간의 삶과 본성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곤 했다.
나는 웬디의 편안함과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에 매료되었다.
언젠가 내가 웬디에게 '책을 많이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수업 시간 후에 웬디는 나를 도서관 안으로 데려가더니 본인이 흥미롭게 읽은 책들을 직접 찾아주었고, 또 다른 장르의 책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 날 나는 웬디가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 은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어느 토요일 아침에는 도서관 한편에 있는 카페에서 우연히 웬디를 만났다. 둘 다 그 도서관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이후로 토요일이면 가끔씩 만나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곤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시간을 두고 친구로 발전했다.
웬디는 정원을 가꾸는 것을 사랑하고, 시를 쓰는 시인이다(출판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늘 시를 쓰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눈다. 나는 그녀의 시와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책으로 엮어졌으면 하고 바란다). 시의 주제는 주로 '삶과 자연'에 대한 것이다.
올해 74세인 웬디는 20여년 전에 이혼하고 쭉 혼자 살아오고 있다. 오랜 세월, 결혼과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다고 한다.
이혼 후 혼자 살면서 정원을 가꾸며 자연과 교감하고, 책을 읽고 시를 쓰며 그녀는 서서히 자신을 다시 찾고 발견해 가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연구 주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며 눈을 빛내며 말하는 웬디를 볼 때마다 나는 70세가 넘은 그녀의 나이를 잊곤 한다.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모든 것에는 깨어진 틈이 있다.
바로 그 곳으로 빛이 들어온다.
캐나다인 싱어송라이터인 레오나르도 코헨Leonardo Cohen의 말이다.
언어 장벽에 막히고, 낯선 사회 시스템에서 살고자 애쓰는 동안, 상처입고 부서진 이민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며 웬디가 즐겨 사용하는 인용구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안고 있으며 그 곳으로 삶에 대한 지혜가 스며들기 마련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언젠가 웬디가 깨진 그릇들을 송진으로 이어 붙이고 금이나 은으로 마무리하는 일본의 킨추기(Kintsugi) 예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 삶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 저기 깨진 흔적들 때문이 아니겠냐며, 킨추기 예술에서는 그 깨진 모양 때문에 더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상처와 아픔들을 보듬어 안은 우리의 삶도 그것들로 인해 더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민자들이 자신의 영어를 부끄러워하고, 정착 과정에서 힘들어 할 때마다 웬디는 이렇게 말한다.
"뉴질랜드라는 다른 나라에 이민을 왔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비록 영어 때문에 가끔 어눌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당신들은 모두 고국에서 지적이고 훌륭한 시민들이었다는 것을 전 알아요. 그것을 꼭 기억하길 바라요."
부족한 영어를 뛰어넘어 우리의 본 모습을 볼 줄 아는 웬디의 따뜻한 시선은 참 귀하다.
영어는 매개체일 뿐, 웬디와 다른 자원 봉사자들로부터 우리는 날마다 내면의 용기를 끌어 올리는 법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역경을 이겨 낼 힘을 얻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웬디,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