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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킴 Aug 14. 2021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착각




엄마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시작은 이랬다. 어느 날 아침, 시현이가 나에게 이유 없는 짜증을 부렸다. 올해 초 생일 선물로 귀 피어싱을 해 줬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한 쪽 귀에 염증이 생겼던 것이다. 잠을 자는 동안 뒤척이면 아프니 밤에 빼 놓았다가 아침에 다시 끼우는데 그것이 아프기만 하고 잘 끼워지지는 않으니 꽤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날 아침, 피어싱을 잡고 꽤 오랫동안 씨름을 했는데도 마음대로 안 되니 괜히 애먼 나에게 버럭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어이가 없어 여러가지 말을 쏟아내고 싶었으나 그냥 참아 주었다. 때로 그것이 ‘엄마’라는 존재가 해야 되는 일 같아서 말이다. 그러다 불현듯 먼 옛날 엄마와 얽힌 한 사건이 생각이 났다.






내가 시현이 정도 나이였을 때다. 30년도 더 넘은 과거 어느 여름 일요일 오후였다. 오빠들은 뭘 하고 있었는지 그날 엄마와 나 단 둘이 뙤약볕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기말고사 바로 전날인데 공부해 놓은 것이 별로 없었던 나는 갑작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밭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고 남아 있는 이랑을 보니 해가 진 이후에나 집에 가게 생겼던 것이다.


사실 공부를 핑계로 그 뙤약볕에서 김매는 일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이글거리는 해는 하늘 정중앙에 있었고 근처에는 더위를 잠깐이라도 피할 수 있는 그늘 한 점이 없었다. 머리가 띵 했다. 목도 마르고 쭈그리고 앉아 있던 다리도 아프고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내일 시험 준비를 해야 하니 집에 보내 달라고 했다. 엄마는 단칼에 안된다고 했다.


엄마와 나의 실랑이는 그렇게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수많은 말이 오고 갔고, 결국 우리의 실랑이는 자존심 대결로 치달았다. 나는 다음날 시험을 본다는데도 나를 집에 보내 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했다.


'다른 엄마들은 시험 기간에는 일도 안 시킨다는데...'


공부하겠다고 하는데도 허락을 안 하니 마음에 뿔이 잔뜩 났다. 평상시 공부하라는 소리도 한 번 안 하는 엄마의 마음이 혹여 무관심인가 싶어 내심 서운했던 마음까지 더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엄마가 나의 학교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강하게 내 주장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일을 하기 싫은 핑계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나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의 의도의 결백성을 주장했다. 정말 공부 때문이라고 아무리 호소를 해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엄마의 고집스러움에 급기야 나는 무리수를 두었다.


우리가 김을 매던 밭은 산등성이에 비스듬히 누워 있어 ‘등밭’이라고 불렸는데, 내가 그 밭에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밭을 온몸으로 굴러내려가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엄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딱 한 마디를 날리셨다.


'쇼하지 마라.'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밭일이 끝나기 전에는 엄마가 나를 집으로 보내주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자리로 돌아가 묵묵히 김을 맸다.


한동안 엄마와 나의 호미 소리만 그 여름의 한 낮을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 김 매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엄마가 내게 집으로 가라고 했다. 혹여 엄마 마음이 바뀔세라 나는 냅다 호미를 던지고 밭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때 밭과 밭 사이의 자갈 길을 걸으며 속으로 했던 다짐은 평생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다시는 그런 헛된 시도는 하지 말자.’


고 그름에 대한 사안이나 자존심이 걸린 대결에서는 엄마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에 깊게 새기던 날이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착각


그 사건이 남긴 상흔은 꽤 컸는지, 나는 마치 엄마에게 배려와 사랑을 평생 한 번도 받지 못한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정신적 트라우마가 가져온 기억의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돌아보면 엄마가 나의 터무니없는 요구와 행동들, 혹은 자잘한 거짓말에 그저 눈 감아준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어쨌든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엄마는 자식이 설령 죽는 시늉을 하더라도 절대 져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뇌리 깊이 박혀 버렸다. 엄마가 매정하고 냉정하게 느껴졌고, 그것은 내내 상처로 남았다. 이후, 고등학교를 지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마는 여전히 내게 엄하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가끔씩 '간밤에 엄마랑 싸웠다’며 투덜거리던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엄마와 싸울 수가 있지? 그것이 가능한 일이긴 한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에게 엄마는 어떤 반항도 결코 용납이 안되는 절대적 권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엄마와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를 향해 서운하게 뭉쳐 있는 감정들을 풀어내고 더 살갑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몇 차례 대화를 시도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인생을 바쳐 키운 자식에게 지난날의 일들에 대해 싫은 소리를 들을 때면, 엄마는 자신의 희생이 덧없다고 느끼셨던 것 같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서로의 상처 때문에 상대방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지 못했고, 서로에게 닿지 못한 진심은 더욱 아프게 곪아갔다.


그렇게 이 마음의 매듭을 풀지 못한 채로 엄마를 보냈다.






시현이의 이유 없는 짜증을 받아준 그 날 아침, 문득 돌아가신 엄마에게 글을 쓰고 싶었다. 그 응어리졌던 마음을 모두 풀어내고 싶었다. 온 세상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을 엄마가 이제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이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꽉 차 있는 이야기를 꺼내고 비워서 좀 가벼워지려고, '엄마에게' 혹은 '엄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수 차례 시도한 글은 한 번도 끝을 맺지 못했다. 중간 즈음에 이르면 늘 글이 막혔다. 엄마에 대한 원망은 글을 써갈수록 옅어져서 나중에는 글의 요점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내면의 '어린 아이' 김효정의 마음으로 투정을 부리려 했던 마음은 매번, 혼자서 두 아이들을 키우며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나이 오십'의 지금 나의 마음으로 대체되었다. 지금의 내 나이였을 당시 엄마의 삶이 온 속속들이 이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엄마에 대한 원망의 마음과 엄마의 고단한 인생에 대한 슬픔과 감사의 마음들이 눈물이 되어 며칠이고 흘러내렸다.





엄마에 대해 쓴다는 것


엄마에 대한 첫 글인 <그날 엄마는 뒤돌아 춤을 추었다>는 그런 오랜 마음의 씨름 끝에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엄마를 다시 추억해야 할 당위와 가능성을 느꼈다. 지금 나는 그 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고, 그 당시 내 또래 정도의 아들들을 키운다. 그리고 아빠 대신 바깥일을 해낸 엄마처럼 나 또한 가족의 생계를 혼자서 책임지는 엄마로 살고 있다. 내 마음 속의 ‘어린 나’와 당시의 엄마를 동시에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에 대한 글쓰기는 자연스레 엄마에 대한 추억 혹은 기억을 점검하고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기억이란 얼마든지 편파적이고 왜곡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나는 평생 엄마를 오해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는 2017년 10월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지금의 내 삶 안에서, 나의 일상 안에서 살아있다. 해결되지 않은 해묵은 감정들이 나의 일상을 침범하고 엄마가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과 가치들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다.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고 엄마와 나 사이의 사건은 이미 완료되었으나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바로 엄마의 추억을 가진, 엄마의 삶의 일부를 나눈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엄마를 다르게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할 시간이다.


그동안 나는 엄마를 추억할 때마다 늘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서운함과 죄책감이 섞인 복잡한 마음이었다. 엄마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모든 항변도 엄마의 삶이 치러낸 엄청난 희생 앞에 그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엄마는 우리 삶의 희로애락 또한 함께 수놓았다. 그것들이 저마다 자기 색깔로 살아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완성된 그 사건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다르게 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엄마를 제대로 추억하는 일이며, 또 엄마와 나의 지난한 역사가 현재를 사는 나의 자양분이 될 것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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