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마련이 아니야!
마포구 용강동.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을 때 내가 처음 둥지를 튼 곳이다. 지금은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옛날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그곳은 화려한 마포대로를 얼굴로 둔 후미지고 그늘 진 곳이었다. 푸른 꿈을 안고 상경한 스무 살 촌뜨기였던 나는 마포대로를 지날 때 그 크고 화려한 외관에 놀랐고, 또 그 뒤로 펼쳐진 이면을 보고 한번 더 놀랐다.
크고 화려한 이면에 초라한 모습이 더욱 골 깊게 두드러진 용강동 일대의 모습은 서울에 대한 환상을 보기 좋게 깨 주는 곳이었다. 얼어붙은 골목길 위로 눈과 함께 연탄 재가 어지러이 부서져 있던 모습은 그저 서막에 불과했다.
내가 살던 곳은 집이라고 부르기 힘든 곳이었다. 집이라가 보다는 비탈지고 좁아터진 골목길 한쪽에 붙어 있던 건물이었다. 그전에 창고로 쓰였던 곳을 칸막이로 방 두 칸을 만들고, 그 두 방을 연결하는 공간을 시멘트로 바른 곳을 욕실 겸 부엌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 부엌과 욕실이라는 것이 실상은 연탄보일러 아궁이와 그 반대편에 세워 놓은 수도꼭지를 일컫는 것에 불과했다. 가스레인지 하나 올려놓을 싱크대도 없었다. 보일러 아궁이 한쪽 공간이 조리대가 되었고, 그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밥도 짓고 세수도 하고 손발도 씻었다. 샤워 시설은 당연히 없었고, 심지어 화장실도 없었다.
수도꼭지 옆에 있는 쪽문을 열고 나가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벽을 타고 오른쪽으로 돌면, 뜬금없이 아주 작은 쪽문이 하나 있었다. 그곳이 화장실이었다. 수세식이 아닌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광주에서 집 한편에 붙은 쪽방에서 자취를 할 때도 화장실은 수세식이었는데, 수도 서울에서 만난 재래식 화장실은 꽤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곳에서 일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고 민망하고 마음이 힘든 일이었다.
당시 내게는 이 화장실 사용을 최소화하는 것 만이 답처럼 보였다. 과민성 대장을 가진, 다른 사람들보다 화장실 사용이 잦은 나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아무리 피한다 한들 하루 최소 두 번은 꼬박꼬박 사용해야만 했다. 잠자러 가기 전과 아침에 일어난 직후에는 어쩔 수 없이 이 민망한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특히 아침 화장실 사용은 더욱 민망했다. 이른 아침부터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의 잰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다가, 무조건 반사로 '흡!' 숨을 들이쉬고 볼 일을 멈추어야만 했다.
최대한 이 화장실 사용을 피하는 방법은 일지감치 학교로 가고 최대한 늦게 집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에 문을 열고 밤늦게 문을 닫는 학교 도서관이 좋은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당시 매일 술을 마시는 것이 일이었는데, 혹여 술자리가 일찍 끝날라치면 학교 도서관을 전전하다 집으로 향하곤 했다. 도서관은 공부하는 공간이라고 보다는 내게는 깨끗한 화장실이 있는 좋은 휴식공간이었다.
그렇게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려 터덜 터덜 좁은 언덕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엇갈린 상념으로 가득 찼다. 특히나, 집에 들어가기 직전 화장실을 들렀다가 몸을 돌리면, 한강 너머 아파트촌의 불빛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따라 점점이 박힌 도로의 가로등 불빛과 아파트촌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멋진 광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이내 좁은 길과 쪽문을 보며 차가운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집들이 저리 많은데, 내 한 몸 누일 집은 왜 없는가?'라는 푸념을 했다. 그 생각이 버거워지고, 마음에서 떨쳐 버리기 힘들어지던 어느 날부터 나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외면했다.
그 용강동 집을 시작으로 나의 떠돌이 생활이 본격화되었다. 대학 4년 동안, 거처를 8번 정도 옮겨 다녔다. 친척집, 입주 과외와 자취집을 전전했던 나는 졸업을 하고도 마포를 중점으로 여기저기로 떠다녔다. 이후로 30대가 넘어서야 비로소 부엌과 욕실, 그리고 방이 제대로 분리되어 갖추어진 집에 살기 시작했고, 그리고 곧 내 집도 한 채 마련했다.
용강동 비탈길에서 강 건너 아름다운 밤 풍경을 바라보던 그 시절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집은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조건으로 의식주를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거주할 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내 집 마련이라는 것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들이는가? 집이 있다면, 그 노력과 에너지를 삶을 더 풍요롭게 가꾸는 데 쓸 수 있으니, 그것은 기본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집 한 채를 소유한 것으로 집에 대한 걱정과 고민을 끝낸 내게 집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다.
내 기본권을 함부로 내주지 않듯이 그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팔지 않았던 작은 집을 결국엔 팔았다. 이곳에서 유학 후 이민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공부를 끝내고 직장을 구해서 갚을 요량이었다. 용케 졸업하기 전에 구했던 직장을 얼마 후 시작된 코로나 사태로 잃었다. 그렇게 직장을 잃은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으니 재취업의 관문은 좁아져만 갔다. 특히나 외국인 신분으로서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요원한 일이었다. 이자는 매일 늘고, 현금이 없으니, 살아갈 날이 암담했다. 일단 살고 보자는 생각으로 집을 처분했다. 돌고 돌아 결국 이곳 뉴질랜드에서 다시 무주택자가 된 것이다.
코로나 직후라서 큰 손실 없이 집을 판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도 잠시, 곧 뉴질랜드 집값이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집값만 올랐으면 어차피 지난 일이려니 하고 말 것인데, 집 값 상승과 함께 렌트비도 동반 상승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싼 렌트비는 더 비싸졌다. 세 식구 생활비보다 더 높은 렌트비를 내다보니, 기가 막힌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닿을 수도 없는 곳으로 올라 버린 집값을 보며, 집 소유에 대한 생각을 버렸다. 어차피 세상은 이상대로 돌아가지 않은데, 집을 기본권 중 하나라고 여기면 기본권도 실현되지 않은 삶에 대한 쓰라림만 더할 것 같았다. 그래서는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여차하면 무리하게 집을 마련해 보겠다고 장기 융자를 받고, 그 융자를 갚기 위해 거기에 매여 버릴까 봐 지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집 소유에 대한 관점을 바꾸니 상황이 조금 다르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예 집을 사지 말고 렌트비를 내면서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장기 융자 할부금에 좀 더 얹으면 렌트비를 충당할 수 있다. 집을 사면, 직장을 옮기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렌트를 하면 이 집 저 집 다양한 집에서 살아볼 수도 있고, 사는 도시나 지역도 바꾸어 가며 살아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전환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마음은 거기서 더 나아갔다.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고향집을 떠나던 그날 이후로 나의 떠돌이 생활은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집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로 이곳저곳을 떠돌았으니, 내게 집은 시절 인연에 맞추어 사는 공간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집의 크기나 인테리어 등에 신경을 써본 적이 거의 없다. 내게 집은 예쁘거나 멋있게 또는 더욱 안락하게 가꾸어야 하는 곳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가족과 함께 휴식하고 기운을 재충전하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기능이 되는 깨끗한 공간이면 된다.
집 소유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나니, 뜻밖의 자유로움이 성큼 들어섰다. 내 지붕이 반드시 뉴질랜드나 대한민국에 있을 필요가 있는가? 어차피 렌트비를 내야 하는 삶이라면 같은 값으로 시야를 더 넓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늘 마음 깊숙이 눌러 놓았던 세계 여행에 대한 꿈이 슬그머니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계를 돌아다녀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집이 없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 마음이 날개라도 단 듯 하늘로 둥실둥실 떠오른다. 한 번 꽂힌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거침없이 펼쳐진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집을 빌려 살자! 이렇게 새로운 꿈을 꾼다. 다행히 아이들이 내가 만든 둥지를 곧 떠날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때까지 준비해야 할 항목을 써 보았다.
1. 소유를 더욱 줄일 것
2. 프리랜서로서의 수입을 창출할 것
3. 너무 편한 잠자리를 추구하지 말 것
4. 어디에나 거할 수 있고 돌아다닐 수 있는 튼튼한 몸을 만들 것
5. 디지털 기술에 능통할 것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실현 못할 목표가 아니다. 집이라는 큰 번뇌를 없애고 보니, 이미 상당히 가벼워져 있다. 가진 물건 수를 줄이고, 편안함에 대한 추구를 버리면 더 가벼워질 것이다. 비우는 것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을 갖추기도 해야 한다. 수입 창출력과 디지털 기술력 그리고 몸의 근력을 키워야 한다.
다시 무주택자가 되어 꾸는 꿈이 꽤 즐겁다. 언젠가는 어떤 형식으로 머물게 될 날이 오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무주택자가 가질 수 있는 혜택을 실컷 누려보고 싶다. 아직은 렌트비에도 매여 있는 상황이지만, 조만간 거주의 자유를 좀 더 확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터넷 세계를 이용해 돈을 벌며 세계 이곳저곳을 내 발로 누비고 다니는 디지털 유목민이 되는 것, 집 없이 사는 내가 꾸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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