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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킴 Jan 07. 2022

새해 계획에서 다이어트가 사라졌다!

내 몸을 사랑한다는 것 

처음이다, 새해 계획에 '다이어트'가 없는 것은! 외모에 눈을 뜨고 난 이후로, 늘 새해 계획 목록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던 다이어트가 사라졌다. 내가 원하는 몸무게에 도달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내 몸무게는 표준이라 알려진 몸무게에서 플러스 마이너스 5킬로 이내인 소위 '정상' 범위 안에도 들지 않는다. 


대학생이 된 이래로, 아니 공부하느라 정신없던 고교 시절부터 몸무게는 평생 나를 괴롭혔다. 내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내 인생을 힘들게 한 요소중 하나이다. 때론 부끄럽고 때론 자존심이 상해서 새해 목표에 적어놓지 않았던 경우에도, 속으로 은밀히 몇 키로만 더 빼자고 다짐하곤 했다. '건강을 위해서'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앞에 내세울 때에도 당연히 몸무게를 표준 몸무게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몸무게 이슈는 항상 외모 콤플렉스로 이어졌고, 그것은 또 곧바로 여자라는 콤플렉스로 연결되었다. 몸무게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반드시 건강의 문제만도 아니었다. 몸무게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광범위하며 복잡한 문제였다. 정상과 비정상, 표준과 비표준을 가르는 문제였다. 특히나 여자의 몸무게는 여성성과도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나의 외모 (특히 몸무게)가 또 내가 여자인 것이 콤플렉스가 되었을까? 도대체 어쩌다가 내 타고난 몸이 콤플렉스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까? 


내 막내 오빠는 나보다 세 살이 많다. 오빠가 초등학교 6학년, 즉 사춘기에 막 접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오빠는 종종 나에게 주먹질을 했다. 이유는 '가시나가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안 오고 늦게까지 밖으로 나돈다'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도는(?) 동안 내가 특별히 뭔가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방과 후에 집으로 직행하지 않고, 친구들과 노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를 오빠는 못마땅해했다. 


나는 오빠의 그 말도 또 나를 때리는 그 행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딱히 집에 간다 하더라고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집으로 일찍 돌아가야만 할까? 농번기에 집에 할 일이 있으면 알아서 일찍 집으로 돌아갔고, 집안 일도 거의 내가 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일까? 내가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는가? 왜 여기서 내가 '가시나' 즉 여자 아이인 것이 문제가 될까? 그게 맞을 일인가? 그런 생각에 도저히 오빠 말에 동의할 수도 없었고, 또 나의 여자 됨과 나의 시간 사용에 대한 오빠의 간섭을 참을 수 없었다. 


오빠가 때리면 나는 얌전해지는 대신에 악을 쓰며 대들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큰일을 치를 뻔 한적도 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날도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오빠가 나타나서는 또 같은 이유를 대며 나를 한 대 후려쳤다. 성이 난 나는 바락 바락 대들었다. 내가 대들자 오빠는 다시 주먹을 들었다. 오빠가 때린 주먹이 내 명치를 강타했고, 나는 그대로 흙먼지를 날리며 길바닥에 쓰러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위가 고요해지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숨도 못 쉬고 웅크린 내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친구들도 오빠도 그대로 얼어버렸다. 이때의 사건이 오빠에게도 큰 충격이었는지 그 후로 주먹다짐은 사라졌다. 


오빠가 나를 때린 이유는 간단했다. 여자애는 여자애답게 얌전히 일찍 집에 들어오는 것. 그리고, 사춘기를 지날 때는 다른 (딱히 정해진 누군가는 아니었고, 아마도 오빠 마음속의 예쁜 누이동생에 대한 환상이었던 듯하다) 여학생들처럼 외모를 단정히 예쁘게 꾸미라는 것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그 사건 이후로 신체적인 주먹질은 없었지만, 나는 '여자'인 것을 이유로 오빠에게 때때로 정신적으로 두들겨 맞는 것처럼 느꼈다. 


대학생이 되자 오빠는 나더러 살을 빼라고 했고, 무조건 예쁘게 꾸미고 다니라고 했다. 대학 1학년 때 찍은 사진 속의 나는 정말 예뻤다. 화장기 없는 단발머리의 나는 20대의 싱그러운 미소를 활짝 지어 올린 건강한 청춘이었다. 오빠는 푸릇푸릇한 대학생이었던 나의 꿈에 대해서 물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무엇이 되고 싶고,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오빠 나름대로 '여대생'인 여동생의 삶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오빠가 나를 미워해서 때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빠가 나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어쩌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에 대한 애정을 서툴고 비뚤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오빠가 여동생이라는 이미지에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지만, 오빠가 내게 했던 말들로 대강 추측해 볼 수는 있을 듯하다. 외모가 여리고 예쁘장하고 성격적으로는 온순하고 고분고분하며, 집안을 알뜰살뜰 잘 가꾸는 여동생이길 원했던 듯하다. 


오빠가 고대했던 '여자 아이'에 대한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다. 평생 살아오면서, 나의 막내 오빠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전체 사회가 '여성성'에 대한 표준 규약이라도 맺은 것 마냥 여자인 내게 쏟아내는 말들은 늘 거기서 유사했다. 성격적으로는 여성스럽지 않아도 외모는 여성스러워야 된다는 논리 없는 말도 들었다. 아무리 사회적 능력이 있어도 여성적인 매력이 없으면 여자로서 인생은 끝났다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도 들었다. 


한때, 우스개 소리였지만 실상은 전혀 우스개 소리가 아닌, '얼굴이 안 착하면 몸매라도 착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했다. '얼굴은 못 바꿔도 몸매는 바꿀 수 있지 않느냐. 몸매는 자기 관리의 하나다' 등 여자들의 몸무게를 두고 많은 말들이 떠다녔다. 몸매는 (혹은 몸무게는) 자기 관리의 시금석 같았다. 몸매 관리를 하지 않은 여자는 마치 자기를 관리할 줄 모르는 혹은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듯했다. 


어떤 개그 프로에서 시작된 '못 생겨서 미안합니다.'라는 말도 꽤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개그적 상황에서 나온 말이라 그 말은 웃음을 자아냈고, 바로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은 오히려 외모에 자신 있는 사람이 유머스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외모에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그 말을 하는 것이 힘들지 않을 것이기에... 그래서 반대급부로, 그 말을 하지 않으면 마치 그것이 자신의 못 생김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마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기도 했다. 웃자고 하는 말에 정색하고 덤빈다는 말을 들을세라, 무엇이라 항변도 못하고 불편한 마음을 억지로 삼키곤 했던 기억이 있다. 


좋은 의도였든 아니었든 외모에 대한 사회적 프레임과 말들은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외모를 평가하는 말들이 내 살점을 지나고 뼈를 통과해 세포 단위 속까지 스며들었던 것 같다. 거부하면서도 급기야는 내재화되어 버린 그 몸에 대한 표준성과 정상성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다이어트를 하며 나 스스로를 괴롭혀 온 것이다.   


꽤 실행력이 높고 의지가 강한 편인데도 나는 다이어트에는 번번이 실패하곤 했는데, 그 실패는 나의 몸을 싫어하고 저주하는 아주 어이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했다. 나의 타고난 병증인 섬유근통증후군과 이와 관련된 우울증이 다이어트에 최대의 방해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몸이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내 앞길을 막는 방해물처럼 생각되었다. 나의 몸은 왜 이리 외부 자극과 통증에 예민하며, 호르몬은 왜 장난질을 하는가? 급기야 한 번은 '왜 이따위 몸으로 나를 낳았냐'며 죄도 없는 엄마에게 좌절감을 쏟아 붓기도 했다. 


도대체 정상 몸무게와 표준 몸무게는 누가 어떤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이 정상과 표준이 껴안지 못한 '몸'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왜 '착하지 못한 몸매'로 규정되고, 그들은 왜 '못 생겨서 미안'해야 할까? 이른바 표준 몸무게 이상의 몸을 지닌 사람들은 왜 졸지에 의지 박약아에 게으른 사람이 되고 마는 걸까? 


유전적, 사회/ 경제적 요인이 빠져버린 우리의 몸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생명 없는 숫자로 재단되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어떤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다른' 몸은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하는 '틀린' 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얼굴 생김이나 몸무게, 피부 색깔과 성(性)과 무관하게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은 공염불이 되고 만다. 


내 안에 학습된 천편일률적인 잣대를 몰아내고 나의 이 몸을 사랑하기까지 한 세월 걸렸다. 나에게 들이댔던 잣대는 다른 사람을 재단하는 잣대로도 작동했음은 당연한 이치다. 내가 아픈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혀 왔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그 짧고 좁은 잣대를 버리고 나니 나 자신도 다른 사람도 훨씬 편안하고 자유롭다. 


어쨌거나 새해 이루고 싶은 목록에서 다이어트가 빠진 것은 내 개인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굳이 그들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내 몸매는 이대로 착하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이/ 내 얼굴이 그 누구에게도 안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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