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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연 Nov 26. 2024

다정한 것에 면역이 없다.

어제 한겨레 교육 16주 과정, 그래픽노블 2기 수업을 끝마쳤다.

다들 비장의 무기를 숨겨놓은 듯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시간이 되자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림과 글을 가지고 오셨다. 창작 과정인 만큼, 나는 수강생들이 꺼내 놓지 않으면 그분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알 수가 없다. 적극적으로 꺼내놓고 보여주셔야 나도 거기에 맞게 충분한 피드백을 보낼 수 있다. 나에게 주고 싶은 것이 많이 있어도 안 보여 주시면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게 늘 안타깝다.


대학원 시절, 튜터가 '너의 주제니까 네가 알아서 발전시키고 조사해서 스케치북에 습작도 알아서 하고 가지고 와라'라고 처음 과제를 냈을 때 참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라는 건지,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도 처음에는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열 살은 어린 동기들에 비해 절박한 마음도 있었고, 이렇게 자유롭게 그림만 그리고 생각하는 시간이 내 평생에서 두 번은 안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30대와 40대로 들어가면서 그런 꿈같은 시기는 오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무엇이라도 꺼내놓기 위해 도서관에서 만난 그림책 입문서의 어떤 문장을 , 전시회 티켓을, 길 가다 주은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모두 스케치북에 붙였다. 병뚜껑으로 양파망으로 주방세제, 매니큐어. 모든 것이 그리는 도구가 되었다. 어떤 날은 실험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하루에 20장도 넘게 그린적도 있었다.  한 해 동안 세 권의 그림책이 완성되었고, 그중 두 권은 이미 출판되었고, 12년의 시간이 지나 나머지 한 권도 내년 4월에 출판을 앞두고 있다. 그때는 가끔씩 내가 지금 뭘 하는 걸까? 이런 과정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바보 같은 시행착오의 순간들은 기회가 왔을 때 실컷 해야 하는 게 맞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마지막 졸업전시에 습작 스케치북을 함께 전시하는 기간이 며칠 껴있었는데 테이블 가득 산처럼 쌓여있었던 나의 습작들을 보고 많이들 놀라셨다. Well이라는 동네 교회에 같이 다녔던 튜터가 있었는데, 나에게 너는 이번해에 최고의 학생이야!라고 나를 추켜세워주었다. 그때는 그게 예의상 내가 옆에 있으니까 그렇게 말해 주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내가 입장을 바뀌어 뒤돌아보니 자신의 혼돈스럽고 완성되지 않은 습작 과정들을 고스란히 다 보여주는 학생의 용기가 선생님의 입장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충분히 그 분야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상태로 대학원에 입학했고, 그 혼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졸업 후에도 한참을 해메야했다. 대학원 시절같이 나의 그림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 주고 응원해 주고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면 좋을지 기준을 잡아줄 선생님도 동료도 없었다. 그때의 나는 혼자서 작가생활을 유지한다는 게 정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내가 그것에 대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짧지 않은 시간 가졌던 탓인지, 나는 수강생들의 습작노트를 보면 반갑다. 그들의 도전과 실패의 과정이 그리고 그로 인해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함께 알게 될 때, 내 작업이 아님에도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완성도의 차이와 관계없이 각자가 많은 것을 가져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시간은 항상 뭉클하다. 대학원 과정 내내 튜터들은 나의 노력을 알아봐 주고 항상 좋은 점을 찾아주었다. 그때 받았던 칭찬들이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힘이 된다. 내가 그렇게 받았던 것처럼, 한 명 한 명에게 칭찬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제는 시간이 촉박해서 수정해야 할 사항만 다다다다 이야기한 것 같아서 안타깝다.)


말도 안 되는 글도 써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많이 망한 것 같다는 기분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성장한다. 부디 수강생 분들이 그때의 기분을 기억하고 매일 조금씩 달라지기를, 마음속 깊이 응원한다.


어제 갑자기 깜짝 이벤트가 있었는데 내가 다정한 것에 면역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벌레처럼 말려가지고 벽에 붙어서 비명을 질렀다. 한 사람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이 나에게 흡수된다. 아마도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래서 모든 만남들이 참 귀하다. 이번 해는 아프기도 엄청 아팠고 다양한 만남이 있었고 새로운 감정에 대해 알게 해 주었다. 그래서 특별했다.     


짧게 케이크를 앞두고 빌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앞으로의 작업이 성과가 있기를.

그리고 저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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