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연 Jan 25. 2021

Silent consolation

말없는 위로


내가 누군가로 인해 진심으로 위로를 받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그런 순간들이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지금까지 그런 경험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무언가 한마디 한마디 말을 얹는다.

하지만 그 말로 인해서 더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걱정이 돼서, 도와주기 위해서 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배려가 부족했고 결국 나의 기분은 상해있었다.

때로는 정말이지 그 말 한마디를 차라리 듣지 않았었다면.. 싶을 정도로 최악의 참견들도 있었다.

분명히 나에게 관심과 애정이 있어서 한 이야기였을 텐데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님들로 인해 우리 집은 혼자 있을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들은 주로 햇빛 드는 창문 앞에 흩어지는 먼지를 몇 시간씩 바라보며 멍 떼 리던 순간들과 크고 작은 동물들과 노닥거리던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내가 학교 앞에서 데려왔던 병아리 몇 마리, 오리, 금붕어.

부모님이 언젠가 데려온 작은 거북이 두 마리, 삽살개 잡종 한 마리, 도사견 한두어 마리, 그냥 똥개 몇몇 마리, 치와와도 있었고..

아빠가 트럭을 몰고 가다가 다치게 해서 날을 때까지 데리고 있었던 비단 같은 초록색이 예뻤던 청둥오리, 토끼, 뱀도 있었다.

같은 집에 살았던 고모네 집에는 항상 메추라기와 잉꼬부부가 있었고 옥상에 날아와서 갑자기 가족이 되었던 이름 모를 하얀 새도 한 마리 있었다. 그리고 어떤 들새인지 우리 집 앞에서 알을 부화시켜두고 가버려서 엄마랑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던 기억도 있다. 너무 작은 갓 부화한 그새의 투명하고 붉은 배로 우리가 준 노르스름한 이유식이 그대로 비쳐 보였었다. 적지 않은 동물과의 기억이 내 유년시절에 남아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유난히 동물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캄보디아에 갔을 때도 팔뚝만 한 뱀을 내 목에 걸 때도 나는 온기와 사랑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친근함들..

결혼을 하고 신혼시절에는 나의 이유 없는 개사랑에 대해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던 민호도, 길 건너편 낯선 개가 나를 보고 이유 없이 뛰어오며 나에게 폭 안기는 것을 몇 번 보고는 내가 왜 그렇게 개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가지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선택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나이가 들고, 조금은 변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작은 동물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진짜로 내 감정을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내 옷자락이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새의 깃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내가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 불안이나 후회, 공포에서 잠시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나에게 아주 나쁜 습관이 있었다. 나쁜 기억일수록 다시 되새기고 후회하고 짜증 내는 버릇이었다.

비생산적이며 나의 시간과 감정을 파괴하는 습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십 대 시절부터 하루도 멈추지 않고 반복하는 습관이었다. 얼마나 고질적이었는지 나는 똑바로 누워서 자지도 못했다. 나의 이 나쁜 버릇은 내 무의식을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똑바로 누워 자는 날은 어김없이 가위를 눌리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냥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감정은 나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쉽사리 기분이 우울해지고 심장이 아팠었다. 살구를 데려오고 일주일이 지나고 정신없이 아침에 출근 준비를 서둘러하다가 문을 닫고 나오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 바보 같은 복기의 버릇을 지난 이틀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든 떨쳐내 보려고 노력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는데,

살구는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걸까..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는 작은 새일뿐인데..


한 친구와 (이 친구와의 트라우마에 대한 대화는 내 인생 통틀어 유일한 경험이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고 싶다)의 추천도서를 나누던 중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영문판:The body keeps the score)가 공통 리스트에 들어가 있었고 오랜만에 책장에 꽂혀있던 그 책을 다시 뒤적거렸다.




10장 발달 과정의 트라우마: 숨겨진 유행병. 245p.

마리아라는 열다섯 살짜리 남아메리카계 소녀는 미국의 보육원에서 자라는 약 50만 명의 아이 중 한 명으로 , 거주형 치료 시설에서 치료를 받았다. 비만에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마리아는 성적,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겪은 적이 있으며 여덟 살 때부터 주거지가 20곳 넘게 바뀌었다. 내가 마리아를 처음 만난 날, 수북한 의료 기록이 함께 전해졌다. 기록을 훑어보니 마리아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이며, 강한 복수심을 품고 있고, 충동적이고, 무모하고, 자해 행동을 보이고, 기분 변화가 극심하며, 급격히 화를 내는 성향이 있다는 설명들이 적혀 있었다. 마리아는 자신을 '쓰레기, 쓸모없는 존재, 거부당한 애'로 묘사했다. 

몇 차례 이어진 자살 시도 끝에 마리아는 우리 병원에 설치된 거주형 치료 센터 중 한 곳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입을 꼭 다물고 내성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누가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폭력성을 드러냈다. 몇 가지 치료가 시도되었지만 다 실패로 돌아가고, 마침내 말을 이용한 치료 프로그램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자기 말을 매일 손질해 주기도 하고 말을 다루는 간단한 기술도 익혔다. 2년 뒤,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마리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4년제 대학에 입학 허가도 받은 상태였다. 내가 가장 도움이 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돌본 그 말요."

말과 함께 있으면서, 마리아는 처음으로 안전하다는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참을성 있게 자신을 기다리고, 다가가면 기뻐하는 기색도 느낄 수 있었다. 마리아는 다른 존재와 처음으로 깊은 감정적 유대감을 느꼈고 친구를 대하듯 말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른 아이들과도 말을 나누기 시작했고, 마침내 담당 상담사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135p.

인간은 가까이 있는 사람(그리고 동물)의 미묘한 감정 변화에 맞추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눈썹에 나타난 긴장, 눈 주변의 주름, 입의 곡선, 목의 각도가 조금만 바뀌어도 우리는 상대방이 편안한지, 의심을 품고 있는지, 긴장이 풀린 상태인지, 겁을 먹었는지 재빨리 알아챈다. 우리 몸의 거울 뉴런은 상대방의 내적 경험을 인식하며, 몸 전체는 인지한 정보에 따라 내적인 적응에 돌입한다. 이를 통해 우리 얼굴의 근육이 지금 얼마나 평온하고 얼마나 흥분된 상태인지,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는지 잠잠한지, 곧 덤벼들어 물고 늘어질 태세인지 도망갈 준비 중인지 상대방에게 단서를 제공한다. 상대방에게서 '나와 있으면 안전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으면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남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행운이 따르면, 우리는 격력 와지지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상대방의 얼굴과 눈을 들여다보면서 회복되기도 한다.  



살구는 우리 집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아직 날지도 못하는 아기새였다. 내가 출근 준비를 하자 테이블 위에 있던 새장에서 나와서 팔십 센티 높이에 테이블에서 뛰어내렸다. 

살구는 집에 데려온 후 한 장 소에만 가만히 앉아있었다. 마치 움직일 줄 모르는 새 같았다. 너무 정적이라 나는 안심하고 새장을 열어두고 (윙컷이 되어있어서 전혀 날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 새장을 거실에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었다. 그런데 그 높은 테이블에서 움직일 줄 모르던 새가 갑자기 뛰어내린 것이다. 아주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일부러 내려온 것이다. 

나는 조금 놀랐다. 작은 살구가 아직 날지 못하니까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더 놀라고 말았다. 살구가 뒤뚱거리며 삼 미터 정도 떨어진 나에게로 일부러 걸어오고 있었다. 거실 테이블에서 한참 떨어져 있던 거울 앞의 나에게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겨우 나와 3일밖에 같이 있지 않았는데..

이 작은 새가 나와 조금 더 가까이 있겠다고 일부러 탁자 테이블에서 뛰어내려 서툰 발걸음으로 뒤뚱뒤뚱 나에게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 이 감각을 잊고 있었다. 동물들이 나의 감정에 주는 영향력을.. 


내 발 앞에 도착한 살구는 내 발가락 발톱 끝을 부리로 콕콕 쪼았다.

나는 출근 준비를 잠시 미루고 살구를 양손에 받쳐서 바라보았다.

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Yellow bird in blu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