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쟁이는 교환학생 (10): 아미앵-에트르타-옹플뢰르-몽생미셸-헨느
이전 글에 언급했던 E, 그리고 그녀가 프랑스에서 살 때 인턴을 같이 했던 현지인 친구와 셋이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파리 도착 후 에스카르고를 처음 먹은 내가 처음으로 초록색 소스에 빵을 찍어먹으며 신나서,
"I finally feel officially French!(드디어 공식적으로 프랑스인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니 친구분이
"No, this just means you're officially a tourist. (아니, 이제 공식적으로 관광객이 된 거죠.)"라며 웃었다.
두 달 째부터는 교환학생 생활이 마냥 신나는 대신 조금은 힘들 거라고 예언했던 것도 E였던 것 같다. 지난 몇 주간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대사 하나가 맴돌았다.
"It's wherever you go. Because no matter where you run, you just end up running into yourself. (어딜 가든 상관없어. 어디로 도망치든, 결국 너 자신에게로 도망치기 마련이지.)"
교환학생으로서 새로운 경험을 적립하고 새로운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욕심이었다. 매 주말마다 새로운 여행지로 3박 4일 여행을 하는 건 생각보다 피곤했고, 외국인 친구들과 밤 새 술을 마신 후 우버를 타고 돌아오는 새벽 4시는 기대보다 공허했다.
결국 파리까지 와서 서울의 감자탕과 30분짜리 반신욕, 잘 맞는 친구들과의 맛있는 대화가 하고 싶다면 기만일까? 나처럼 모험을 동경하는 사람은 향수병에 걸리기 전에 너무 많이 걸어서 (지난 1년 평균 2만 보 이상입니다^^) 관절염에 걸릴 줄 알았는데!
우리 학교에는 한국인이 11명이나 다닌다.
서강대학교 3명, 숙명여자대학교에서 1명, 성균관대학교 친구들 6명, 그리고 혼자 온 나까지!
성균관대학교에서 온 6명 중 세 명은 1년 반동안 같이 학회를 해서 이미 가족처럼 친하다.
그 세 명은 파리를 떠나 북서쪽으로 아미앵-에트르타-옹플뢰르-몽생미셸을 찍고 돌아오는 길에 헨느-르맹을 거치는 여행을 계획했고, 고맙게도 날 끼워줬다!
마드모아젤은 교환학생 생활을 누구보다 알차게 보내고 있다. 프랑스어 주전공에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하는 중인 그녀는 한국에서 펜팔로 지내던 프랑스 친구들 집에 가서 하루 자고 오거나, 우리 학교에서도 현지인들만 듣는 마케팅 수업 수강에 도전하는 등 한국에서는 할 수 없는 여러 도전과 경험을 하고 있다. 목소리가 경쾌하고 이목구비가 청순한 그녀랑 같이 있으면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써니는 내 중학교 후배다! 등교 첫날, 계단을 올라가다가 귀여운 목소리가 "언니!" 하는 걸 듣고 뭐지 싶어 위를 올려다보니 무려 8년 만에 처음 보는 써니가 있었다. 기운이 선해서 기억에 남는 친구였고, 중학교 때부터 친해지고 싶었는데 인연이 이렇게나 신기하다.
아빠보이는 나와 겹강이 하나 있어서 친해졌는데, 짜증 나게 굴고 티격거릴 때도 많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공감능력이 좋아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친구다. 긴 시간 운전도 혼자 다 하고, 정산도 해주는 아빠 같은 아이라서 아빠보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다. (김치찌개 해주세요)
Chateau de Chantilly로 가는 길에 희한한 형상의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한 나무가 보일 때마다 가리키며 작명했다. 써니랑 마드모아젤은 조금이라도 반응해 줬는데, 아빠보이는 너무나 철저히 무시해서 조금 슬펐다.
첫 밤은 아미앵에서 보냈다. 여러 색의 나무판자로 이루어진 집들과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푸른 근린공원, 아미앵 노트르담 성당까지. 파리에 비해 조용하고 평화로운 도시였다.
써니와 걷다가 작은 빈티지 가게를 하나 발견했다. 잘못 움직이면 뭔갈 깨트릴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가 온통 희신 주인분이 조그맣게 미소 지으며 반겨주셨다.
주로 중고 그릇과 잔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젊은이 세 명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온갖 감탄사를 내뱉으며 서로 더 예쁜 잔을 찾아서 비교하고 있으니 주인분께서 기분이 좋아지셨던 것 같다.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슬쩍슬쩍 쳐다보셨다.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하다가 동네 아트 시네마에서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을 상영한다는 포스터를 발견했다. 파리도 아닌 아미앵에서 한국인들과 한국 음식을 먹으러 가다가 가장 대표적인 한국 영화를 홍보하는 장면을 포착할 확률은?
영화를 보러 들어간 것도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의 포스터를 보니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아미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
다음 날, 몽생미셸로 이동하는 길에 옹플뢰르라는 항구 도시에 들렀다. 여기는 까망베르 치즈를 비롯한 유제품, 홍합 요리, 그리고 사과 음료들이 유명하다고 해서 조금씩 시켜 맛봤다.
막상 시키고 보니 네 그릇 모두 치즈가 포함되어 있어서 느끼하긴 했다... 하지만 아마 저기서 먹은 치즈 피자는 인생 최고이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도우는 담백한 대신, 손에 올리자마자 치즈가 양면으로 흘러내릴 정도로 부드러웠다. 피자를 접고 한 입에 넣은 채 씹을수록 담백해지는 맛이었다.
드디어 여행의 메인 목적지였던 몽생미셸에 도착했다.
해가 지는 모습을 본 후, 네 명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렌터카로 돌아오는 길이 정말 소중했다.
마드모아젤이 갑자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지금 되게 파리지앵 같아! 파리에 사는 건 당연한 거고, 프랑스 근교로 여행 온 기분이다, 안 그래?"
마드모아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니, 지금 느끼는 정체감이 오히려 반가워졌다.
운동하고, 공부하고, 한국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나의 루틴과 버릇들이 돌아오는 현상이 오히려 내가 파리에 적응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프랑스 외곽에 나와보니 지금까지 파리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키패드 대신 물리적인 키로 문을 여는 손짓도, 신호등 색이 바뀌기 전에 건너는 불법행위도, 불랑제리에서 빵을 담아가는 대신 말로 주문하는 일도 이제는 꽤나 자연스러워졌다.
또, 내가 느끼는 향수병은 서울에서도 느꼈던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적도 없었던 걸 그리워하는 건 나의 고질적인 버릇이니까.
꼭 새로워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렌느의 공원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햇살을 즐기는 주민들처럼, 조금 마음을 편히 먹고 외국까지 왔으니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내려놓기로 했다.
상여자는 어디로든 도망치는 삶을 선택하지는 않으니까!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건 좋지만, 도망치지는 않기로 했다.
여행을 끝내고 파리로 들어오니 다시 꽉 막힌 교통과 이제는 익숙한 담배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아빠보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아, 역시 난 파리는 별로야. 진짜 돌아오기 싫었어." 했지만, 난 그 말이 너무 웃겼다. 애정어린 비난은 내집단의 특권이다.
파리로 돌아온 네 명의 코리안은 신나게 파리를 욕하기 시작했다. 마치 여느 다른 파리지앵들처럼! 이제 공식적인 관광객 대신 공식적인 파리지앵에 가까워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