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쟁이의 유럽여행(스페인 3): 말라가
“어어- 거기! 좋은 아침이야.”
아침 6시 반이라는 이른 시간에도 하늘의 온도는 선선했고 색은 짙은 코발트블루였다.
말라가는 투명한 도시다. 마음을 못 숨긴다. 짙었던 하늘은 해가 뜨면서 선명한 하늘색으로 물들어가고, 해가 지면 아쉬운 마음에 흥분해 두 뺨을 진한 분홍색으로 붉힌다.
아무리 주변이 밝다고 하더라도 이 이른 아침 길거리에는 흰 비둘기 몇 마리밖에 없었는데, 날 부른 건 누구지?
“혹시 라이터 갖고 있어?”
누가 봐도 전 날 식도 끝까지 알코올을 채워 넣은 사람이었다. 말 끝에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 특유의 무신경한 어눌함이 묻어 있었다. 위아래로 맞춰 입은 비싼 브랜드의 단정한 반팔 반바지와 뉴욕식 억양에서 철 덜 든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남자의 이름은 Mobe이었다.
“미안해… 라이터 없어.”
“아, 너무 아쉽네. 저기 해변가에 돌 위에 올라가서 담배 피우면 지금 딱인데… 사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기억도 안 나긴 하거든? 그런데 아마 저기서 피다가 라이터를 잃어버린 것 같아.”
Mobe는 Costa del Sol의 테두리를 감싼 넓지만 뾰족한 돌판들을 가리켰다.
돌판들은 비슷한 높이로 쌓여 서로 조금씩 겹쳐 얽혀 있었는데, 슈퍼 마리오 게임 속 계단처럼 하나씩 밟고 올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꽤 높은 고도에 도달하게 된다.
돌 위로 올라가면 방해물 없이 끝없는 알보란 해의 지평선이 한눈에 보인다. 비흡연자지만 Mobe의 말이 어떤 뜻인지 조금 이해 갔다.
가식과 무례함의 스펙트럼 사이에서 솔직함은 어디쯤 위치해 있을까?
투명한 사람의 직설적인 조언에 상처받는 이도, 바른 사람의 예의를 내숭이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결국 많은 관념들이 그렇듯이 정의는 개인마다 고유하겠지만, 난 가식과 예의, 무례함과 솔직함 사이에는 같은 차이,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가식과 무례함은 이기적인 특성들이다.
그에 비해 예의와 솔직함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특성들이다.
말라가가 좋았던 이유는 예의 바르고 솔직한 도시기 때문이었다.
날씨 탓이 크겠지만, 여기서 사람들은 옷을 가볍게 입는다.
어떤 체형이든,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하나도 상관이 없다.
아마 햇살과 중력, 빠른 노화 때문이겠지. 젖꼭지부터 뱃살, 허벅지살까지 동굴 속 종유석처럼 아래로 축 쳐진 할아버지가 웃통을 벗고 속옷만 입으신 채 3층 테라스에서 신문을 읽는다. 신기하다는 듯 올려다보는 나를 무관심한 표정으로 슬쩍 보고 다시 신문에 열중한다.
"도대체 바지를 어떻게 입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골반과 엉덩이가 커다란 라티나 여자가 짧은 숏팬츠와 속옷에 가까운 크롭티를 입고 걷는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릿결과 커피색 피부, 잠자리처럼 커다란 선글라스에 가려졌지만 도톰한 입술로 매력적인 얼굴이 유추됐다.
행인들의 옷차림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마 나뿐이었을 것이다.
말라가의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에 대해서도, 해변가에서 보이는 행동들에 대해서도 서로를 예의 바른 무관심, 그리고 상대방 또한 그럴 것이라는 상호적인 믿음으로 대하고 있었다.
옷차림뿐만이 아니다.
해변가의 울퉁불퉁한 바위들도, 시간에 맞춰 색을 바꾸는 하늘도, 광물로 만든 액세서리를 파는 소박한 상점들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인상, 날 것의 느낌을 줬다.
여기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줄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네르하에 다녀온 후 마지막으로 Costa del Sol을 걸었다.
중년 남성 한 분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옆에는 흰 양동이를 두고 익숙한 몸짓으로 낚싯대를 바다에 던지고 꺼내기를 반복했다.
꽤나 경험이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 승률이 나쁘지 않았다. 본인 성에는 아직 안 찼는지, 몇 번의 실패한 입질 후에 인상을 쓰더니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다시 낚싯대를 던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바위 위의 난간에 앉아 그 광경을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20분 정도 지났나, 남성은 그제야 날 발견하고 힐끗 쳐다봤다. 나는 엄지를 세웠다. 남자는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웃었다.
저 잔잔한 물결에서 물고기가 계속 잡히는 게 신기했다.
낚시라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파괴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날은 저 파도도, 아저씨의 낡은 청바지도, 정수리로 넘어가는 헤어라인도, 입에 문 담배도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그라나다로 떠나기 전에 울퉁불퉁한 해변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바위들의 조각난 틈 사이에서 흰색 라이터를 하나 찾았다.
Mobe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잃어버린 라이터를 대신 발견했다고 믿고 싶어졌다.
Mobe는 샌프란시스코 실리콘 밸리에서 일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해고당했다. 당장 휴식이 필요해서 아일랜드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그 비행기도 해고만큼 갑작스럽게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디로든 떠나야 할 것 같다는 감각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빠른 비행을 선택했고, 우연(운명?)이 그를 말라가로 이끌었다.
나는 요즘 성당에 들어가거나 아름다운 자연에 압도되는 감정이 들면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내용은 항상 같다. 가족의 건강, 나의 소망, 주변 사람들의 평안.
이 날 아침에는 라이터를 손에 만지작대며 Mobe를 위해서도 빠르게 기도했다. 그도 나처럼 솔직한 말라가에 위로받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