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앙떼뜨망 Jun 06. 2024

국경을 맞대면 언젠가는 (J에게)

고집쟁이는 교환학생 (17): 유럽의 언어, 루브르

J, 오늘 네 생각을 했어.


몽소공원에서 독서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이었는데, 2호선 blanche역에 모자 한 쌍이 들어왔어. 

금발의 어머니는 칭얼거리는 곱슬머리 남자아이의 어깨를 꾹 눌러가며 자리에 앉히고 그 앞에서 표정을 수시로 바꿔가며 과장된 손짓을 반복했어. 수화였어.

난 이어폰을 빼고 둘 중 누가 청각장애인인지 관찰했지. 어머니 쪽인 것 같더라.


어디서 이런 글을 읽었어: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2초면 충분하다는 말.

표정, 느낌, 목소리...

목소리는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것 같아. 매력 없다고 생각한 남자도 목소리가 굵고 말투가 점잖으면 한 번 더 눈빛이 가지 않아?

청각장애인에게는 손짓과 표정이 목소리라더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쾌활하고 정 많고 생명력이 넘쳤어. 


그들의 앞에 앉은 중동계 남자도 수화를 할 줄 알았어. 참 신기한 우연이지? 손짓을 이리저리 하며 어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짓다가 이내 감사하다는 수화와 함께 (모두 추측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자리에 앉았어. 



때마침 지하로 달리던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오며 환한 햇살이 우리 칸을 물들였어. 아들의 금색 머리칼과 맑은 벽안이 반짝반짝 빛났어.




J, 난 요즘 일상적인 순간들이 시적으로 변하는 마법을 마주해.

내 가설은 이거야: 여기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 


어제 Christopher라는 독일 친구랑 루브르 박물관에 갔어. 역사학을 전공하는 친구라 무료로 거진 개인 투어를 받았어. 개장 시간부터 마감 시간까지 엄청 걸어서 다리가 아플 정도였어.


그가 식사 도중 흥미로운 얘기를 해줬어. 유럽의 언어는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공식적인 언어와 실질적인 언어가 차이가 있대.



보통의 독일인은 언어를 최소한 두 개 써.


1. 공식적인 독일어

2. 인접한 국가의 언어와 유사한 사투리


어투만 조금 다른 우리나라의 사투리와 다르게 유럽의 사투리들은 단어와 문법도 별개야.

그래서 프랑스와 가까운 독일의 서부 사람들, 그리고 이탈리아어에 가까운 언어를 쓰는 최남단의 사람들은 거의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마치 그라데이션처럼, 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언어가 퍼지는 거지.


메소포타미아 문화부터 시작해 이집트, 중국, 그리스... 주요 문화권의 유적물을 보며 언어에 대한 생각을 했어.

"사랑해"를 가족과 친구, 심지어 사물에게까지 범용적으로 남발하는 서양인들과 다르게, 동양에서는 그 말은 조금 더 로맨틱한 의미를 갖잖아. 중국인 남매가 서로에게 "wǒ ài nǐ"하면... 음, 관계를 의심해야 된대.

그리고 폴리네시아계 사람들의 "사랑"은 연민과 안쓰러움을 내포해. 


내 사전에서는 이 정의가 사랑의 의미와 가깝다고 느껴. 

너를 보면 이런 마음이 들거든.




공식적으로는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우리는 때때로 해석의 과정에서 서로의 진심을 놓치곤 해.

나의 간헐적인 안부 문자를 무심하다고 느낀 친구도 있었고, 네 상냥함을 가식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지.

수화하다가 눈썹을 닦으면 문장의 뜻이 왜곡되는 것처럼, 뜻을 전하기에 우리의 신체와 목소리는 한정적이야.


좁디좁은 한국 내에서도 각 지역, 가정, 개인은 모두 끊임없이 변모하며 고유의 문화를 정립해. 

때를 놓치면, 연습이 부족하면, 귀를 기울이기를 중단하면 잘 안다고 믿었던 언어를 잃어버리게 돼. 오해가 쌓이게 돼.

재밌어, 각자 고유한 문화를 가진 작디작은 국가들이 어깨를 맞댄 유럽 대륙을 알게 될수록 우리가 겪은 사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너와 함께해 온 시간들이 생각났어.


금방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대화를 시작해 보니 턱턱 막히는 작은 언어 장벽들. 

관계를 이어갈수록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너의 이상한 사투리들.

점진적으로 폭이 넓어지는 서로의 단어사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하나인 마야 안젤루가 이렇게 말했어:

People will forget what you said. People will forget what you did. But people will never forget how you made them feel.
사람들은 당신이 하는 말을 잊을 것이다. 당신이 한 행동도 잊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당신이 그들로 하여금 느끼게 한 감정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서툰 프랑스 실력 덕분에 난 이 도시를 반문맹으로 누벼. 

그래서 더 경청하게 돼.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이해하고 싶어한 것처럼, 파리의 사람들을 치열한 집중력으로 관찰하게 돼. 일상적인 순간들이 마법이 되는 원리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원래 그렇잖아, 언어를 가장 빠르게 배우는 방법은 그 말을 하는 상대 - 그게 연인이든, 커리어에 핵심적인 인물이든, 심지어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이든 - 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 이해하려는 간절함을 갖는 거야.


결국 지난 이십년간 날 괴롭힌, 그 누구도 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을 같아.

하지만 누군가의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은, 그 과정에서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내재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껴.


J, 이 글을 쓴 이유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야.

내 언어를 익히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줘서 고마워.

너와 너무 다른 문화를 가진 나를 이해하려고 해 줘서 고마워.


이렇게 계속 국경을 맞대다 보면 언젠가는 해석 없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공식적인 언어와는 다른 우리만의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 때가 될 때까지, 앞으로도 지금처럼 너의 말을 경청할게. 

작가의 이전글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의 영혼들은 어디로 모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