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기준 아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온전히 노력하며 뚜벅뚜벅 걸어간다면 모든 것은 일직선에 놓인다. 이때 걸음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걸어간 길에서 도달한 마지막 지점. 그것이 나의 성취이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 혁명』83-84 p.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이 시점에서 나는 긴 고민에 빠졌다.
한때는 지금 다니는 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목표였고 또 진학 이후에는 그저 '졸업할 수 있게 낙제만 면하자'가 내 매 학기 목표였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원하고 바랬던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단순히 졸업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목표였던 졸업을 지나고 나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난가을 학기는 내가 대학교 3학년 2학기에 경제학과에서 국제학과로 전과를 하고 난 이후 맞이한 공식적인 첫 학기였다. 국제학과 전공선언을 위해 여름에 International Studies 101(국제학과생을 위한 기본 수업) 수업을 듣긴 했지만 가을 학기는 짧은 계절학기와 또 달랐다. 과제를 끝내도 끝낸 것이 아닌. 이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양의 리딩과 글쓰기 과제에 잠식되어 한 학기를 겨우 버텼다.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토론식 수업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일반적인 교육방식을 떠올려보면 학생이 수업에 가서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복습을 한다. 그러나 미국 대학으로 진학하고 난 후, 특히나 수업의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수업은 예습과 토론이 주가 되었다. 학생은 수업에 가기 전에 미리 그 수업 주제와 관련된 책과 논문을 읽고 내용을 정리한 후, 본 수업에서 교수님과 다른 학생들과 함께 예습한 내용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다. 한마디로 수업의 메인이 교수님의 강의가 아닌 학생들의 토론이 되는 것이다.
대안학교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토론식 수업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영어로 원서를 읽고 또 그 원서를 완전히 소화해서 내 말로 풀어내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당연하게도 영어를 잘하는 현지 친구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하려 하니 기가 죽고 긴장이 되어 입이 떨어지지 않은 날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용기를 내어 말을 하는 날이 늘어났지만 학기를 끝내고 서야 비로소 긴장을 늦출 수 있었다.
문제를 푸는 것보다 글 쓰는 게 좋아서, 이론을 외우기보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이 좋아서 시작한 공부였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곧 쉬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학기였다. 글 쓰는 게 좋다 한들 기말로 수업당 10페이지가량의 에세이 과제를 받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마냥 재미있을 줄 알았던 수업들이 발목을 잡게 되자 나는 신경 쓰일만한 것들을 하나 둘 내려놓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좋아하는 나이지만 지난 학기에는 그 무엇에도 손을 데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과제로 받는 리딩 이외에는 다른 책을 읽고 싶지 않았고, 과제로 질리도록 쓰는 글쓰기는 그걸로 족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상상하는 건 더더욱이 귀찮게 느껴졌다. 대신 남는 시간에 내가 머리를 쓰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고 재미까지 있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틀어 두었다.
학기를 마치고 쉼을 가지게 되자 그제야 학기 동안의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치열했는데 결과는 후련하지 않았고, 요란했던 것에 비해 남은 건 많지 않았다. 졸업은 다가오는데 이렇다 할 뚜렷한 미래가 보이지 않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준비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모든 게 떠들썩하게 느껴졌다. 끝없이 재생되는 릴스 말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SNS 말고 소리 없는 공간 그리고 공백. 조용히 내가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그런 고요함이 필요했다.
되도록이면 긴 호흡을 가지고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 말고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쓴 여러 주제에 관한 책을 읽었다. 돈, 공부, 인간관계, 자아 찾기 등. 딱히 어떤 내용을 바라지 않고 아빠가 추천해 주시는 대로 전부 읽었다.
책의 주제는 각각 달랐지만 유독 나에게 박히는 메시지는 한 가지였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마라.
언젠가부터 나는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았다. 어떤 목표를 만들어서 그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의 나는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길고 긴 시간 끝에 이루어낸 성취는 항상 달콤했다. 그러나 성취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고 나는 찾아오는 공허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매번 급하게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과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던 나에게 낙(성취)까지 주어지지 않으니 그저 고생만 한 꼴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마인드가 나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두의 속도는 다르다. 어떤 사람은 토끼처럼 빠르고 또 어떤 사람은 거북이처럼 답답할 만큼 느리다.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과정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 목표에 가까워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과는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매어있으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언젠가 행운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행운도 준비된 사람(꾸준히 달려온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 그러니 목표를 세우되 이후에 후회가 없을 만큼 그 과정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이것이 이번에 책을 읽으며 발견한 배움이다.
대학 졸업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나에게 불안이 아닌 온전한 기쁨이 될 수 있길 나는 마지막 학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최근에 나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는데, 사실 지금의 내가 보기에 그 목표는 아득하고 나는 목표를 이루기에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지레 겁먹지 않고 한번 도전해보려고 한다. 만일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닐지라도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버틴 시간은 분명 나에게 꼭 맞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