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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STA Mar 22. 2021

말광량이에서 지박령으로

혹시 이런 게 히키코모리...?

원래 계약보다 일찍 계약해지 통보를 받고 나는 병원치료 이외에 외출이라곤 하지 않았다. 집에서 쉬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발작, 경련, 악몽으로 인한 잠꼬대는 나를 정말 힘들게 했다. 발작이라도 하면 약을 먹고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사람이 무서워 식탁 밑에 들어가기 일쑤였고 그러다 이마를 박거나 긁히기도 했다. 잠을 자면 정말 싫은 악몽을 꾸었는데 대부분이 운전과 관련된 꿈이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이런 식이다.


꿈에서 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데 자꾸 졸음과 싸운다. 계속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길가에 시도군청에서 하는 화단정리가 한창. 할머니들께서 형형색색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꽃을 심고 계신다. 졸음을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핸들이 자꾸만 우측으로 틀어진다. 눈이 깜빡깜빡하지만 결국 이내 꿈속에서 운전 중 잠이 들어버리고 끔찍한 상황을 마주할 때쯤 깨는 것.


이런 식의 꿈을 꾸다 보면 식은땀은 흥건함은 물론 몸부림을 치는 탓에 온몸에 멍투성이. 결국 새벽에 안방 침실 침대 옆에 매트를 깔고 누워서 자다가 잠꼬대를 하며 허우적거리면 아빠가 급히 깨어나 손이나 다리를 붙잡는다던가 깨우는 게 일상이었다. 가족들 모두 마음이 편할 리 없었지만 그 무렵 약에 취해, 나 자신의 죄책감에 취해, 무력감에 취해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내가 무서워하던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사람들이 5명 이상 보이는 곳, 소리가 번잡한 곳, 사이렌 소리, 그리고 현관문이다. 반려견이 피부가 좋지 않아 병원 치료를 해야 할 때면 동생이 다녀오거나 엄마랑 동행하거나 하고 그마저도 사람이 많으면 땀을 뻘뻘 흘리기 일쑤. 병원에서 준 약에는 아침, 점심, 저녁, 수면제 이외에 비상시 먹으라고 준 약이 하나 있다. 가슴이 조이고 숨이 가쁠 때 먹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덜덜 떨기 시작하면서 바이킹 탈 때 내려가는 그 느낌이 끝나지 않고 사람들이 보이면 먹기도 한다. 아니면 미리 먹어도좋다셔서 저런 식의 외출을 해야만 할 때는 미리 먹곤 했다.


집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도 음악도 그저 고요한 집에서 가끔 사이렌 소리가 들리거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을 뿐. 배가 고플 땐 폭식하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굶고. 그때 당시만큼 배달음식을 많이 먹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세상 참 좋아졌다면서 느꼈던 것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배달어플로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쿠팡이 갖다준다. 오죽하면 쿠팡 로켓맨을 보고 쿠팡 남친 이라는 별칭까지 붙여가며 언제 오나 기다리기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동생이 없으면 무용지물 인 것을. 현관문. 손잡이만 돌리면 있다. 내가 주문한 것들이 잔뜩 있다. 필요한 것들도 있고 쉬는 김에 사본 것들. 하지만 현관문을 열지 못해 동생이랑 배달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음식을 다 식은 채 먹기도 했다. (쿠팡 친구 화이팅!)




모아뒀던 돈은 이렇게 사라져갔다. 게다가 당시에 동생이 법정 소송에 휘말려 가족들이 모두 패닉이었고 이혼가정이었던 우리는 아빠와 엄마의 싸움 가운데에 무참히 음 소거 되는 존재였다. 그때쯤 돈을 쓸 일이 많아졌다. 목돈도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갔다. 동생의 답변서라던가, 준비 서면을 작성하면서 또 한 번 붕 뜨는 날이 왔던 것 같다. 도대체 일을 동생이 휘말렸는데 다들 쓸데없는 목소리만 내고 나만 왜 또 이러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걸 탓 할 시간도 없었기에 법정까지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니 사람이 정말 피폐해져 갔다.



아프기 전에 나는 금요일을 아주 신나게 즐기는 사람이었다. 짙은 화장을 하고 친구들과 번화가로 나가 일주일의 스트레스에 관해 이야기 하며 즐거운 술자리를 갖는 걸 좋아했다. 3번의 내일로와 마음이 내키거나 여유가 생기면 방방곡곡 여행을 다녔다. 사진을 찍기 좋아했던 나는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니며 내가 관심 있는 인물사진에 대해 생각하며 곧잘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곤 했다. 저 얼굴을 어떻게 하면 살려 찍을 수 있을까. 그랬던 내가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게 됐다. 사람이 그저 무서워졌다. 가족들 이외에 전화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친구, 친척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무서웠다. 그쯤 각종 안부 메시지나 유치원 인수인계들 연락이 꽤 올 시기였는데 하나도 읽지 못했다. 거의 전화기를 방치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태퓽이 온다고 해서 모아뒀던 내 다육들(멀쩡할 떄)좌              당시 다니던 다육원(이런 하우스가 3동이나 있었다 .)우

이전엔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식물을 기르며 관심을 두게 된 다육을 보며 시간 보내기를 즐겼다. 다육이 차츰 하나, 둘 늘더니 자구가 늘면 옮겨 심어가며 그러기까지그러기 까지 내가 다니던 우리 지역에서 가장 큰 다육원이 있었는데 일찍 퇴근할 때면 가서 다육식물을다육을 사 오거나 사진을 찍고 언니들과 수다 떨며 놀기도 했다. 그 사육권은 커뮤니티가 있었는데 나는 찍은 사진을 올리며 먼 곳에서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기도 하고 다육이를 맡기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눈이 되어주고 나름의 글솜씨로 인지도도 조금씩 올랐다. 그러다 보니 다육원에 가서 내 이름을 부르면 몇몇 사람이 '어머 저분이 그분이세요?' 하고 글 너무 잘 읽고 있다며 팬이라며 해주실 땐 참 행복했었는데. 수많은 다육이 죽었다. (아마 나는 다육의 신에게 벌 받을 것 같다같다ㅜ) 나 이외에 아무것도 안 보였다.


우리집 막내 동글이♡


그나마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돼주었던 것은 우리 집 반려견 동글이었다. 내가 발작을 하면 핥아주기도 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거나 숨을 헐떡거리면 가만가만 다가와 나에게 몸을 기대곤 기다려주곤 했다. 가족들이 이야기는 위로가 되었지만 결국 그 가해자를 원망하는 말로 항상 끝났기에 떠올리기 싫었다.






그즈음 병원에 가는 게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엔 발길을 끊었다. 계기는 선생님께서 MMPI라는 성격 검사를 하자고 권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성격검사인데 '저 검사지가 나를 이상하게 단정 지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다시는 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이들과 함께해야 하는데.' 그런고로 검사지를 받고는 어떤 진단이 확진이 되어버릴까 봐 다시는 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망상이 커져 병원을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고 안타까운 판단이었지만.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고 했던가. 음주운전 사고를 당해보니 당시 나에게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물론 나는 생명의 지장이 있거나 크게 다치거나 하는 신체적 피해는 없어 다행이었달까? 하지만 가끔 텔레비전에서 음주운전 사건·사고가 뉴스에 나오기라도 하면 솔직히 나라를 원망한 날도 있다. 물론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의 잘못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는 술 취한 사람들에게 너무 관대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는가 하면 같은 피해자로서 분개하기도 하는가 하면 사망 사건에는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평소였더라면 혀를 몇 번 차거나 그저 맘 아프다 정도로 끝났을 이야기가 그 처지가 되어보니 다방면으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억울한 음주운전 사고에 대한 국민청원에는 빠짐없이 동참하기도 하거나 널리 퍼뜨려 달라는 글을 읽으면 복사해서 몇몇 활동도 하지 않는 곳에 드문드문 올리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음주운전에 대해서는 법적인 부분도 있지만, 예방이라던가 보호 차원도 매우 부족하다는 것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에나 나올법한 경찰과의 일들도 겪고 나니 경찰이나 공권력 남용, 이런 일에도 꽤 관심을 가지면서 약자의 편에 서주고 싶은 마음을 잔뜩 키웠다. 댓글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내 작은 움직임이 나처럼 아팠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닿는다면 무엇이라도 했다.


어느 날 아빠와 빨래를 개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 2018년 6월 15일이다. 왜 기억을 하는지는 다음 편에서 나올 테니 기다려주시길.

"아빠 나는 분명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 지금 이렇게 있지 않아도 되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다는 게 너무 분하고 속상하지만 그래도 나는 좀 더 약자에 대해 돌아보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해."

 "그래. 지금은 네가 답답하고 힘들겠지만 언젠간 이 위기를 극복하면 더 성장하는 날이 올 거야"



가만 돌아보니 내가 좀 좋아졌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오다니. 생각해보면 집에 친동생이라 여기는 사촌동생이 조카들과 오기도 하고 가끔 무심코 현관문을 열 때 벅찬 감정이 생기기도 하고. 


그리고 그다음 2018년 6월 16일 새벽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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