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장수 우투리
‘아기장수 우투리’라는 설화가 있다. 비범한 능력을 갖춘 우투리가 있다. 어렸을 때 아이가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을 올라가는 일이 빈번했다. 기이하게 여긴 부모는 몰래 우투리를 엿보았는데, 우투리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 영웅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왕과 귀족은 우투리를 죽이러 군사를 보낸다. 우투리는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사회를 보면 우투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우투리가 나타나 사회를 바꾸고 고통으로부터 해방 해주리라 기대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사실상 없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성군이 얼마나 될까.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역사책을 통해 수백, 수천 년 지나 알게 되는 지도자는 많지 않다.
순백의 옷을 입은 정치인이 어찌어찌 국회에 입성한다 하여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비난한다. 더럽고 부패한 이와 타협한다고 생각한다. 대화와 타협, 투쟁과 타협의 개념은 잊힌다.
나는 우리의 유생 의식이 더욱더 우투리를 찾는 다고 생각한다.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히지 않는다.’ ‘싸우는 것은 애국이요, 타협은 매국이요.’ ‘흰옷을 더럽히지 않고 진흙탕을 걸어야 한다.’는 우리의 직설적이고 본능적인 이분법에 호소한다.
사안에 따라 유생의 기질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률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진흙탕을 걷기 위해서는 더럽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진흙탕을 깨끗이 만들기 위해서는 깨끗한 물을 넣어야 한다. 우리는 깨끗한 물을 보며 더러운 세상과 타협한다고 하지 않는다. 깨끗한 물이 더 많아지면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민이 되어야 할까. 어떤 태도를 갖고 사회를 살아야 할까.
“어떤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정의를 실현할 능력 있는 국가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혼자 힘으로 훌륭한 국가를 만들지 못한다.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은 주권자인 시민들이다. 어떤 시민인가? 자신이 민주공화국 주권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대통령이 된 것과 똑같은 무게의 자부심을 느끼는 시민이다. 주권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이며 어떤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잘 아는 시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책임지면서 공동체의 선을 이루기 위해 타인과 연대하고 행동할 줄 아는 시민이다. 그런 시민이라야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투리가 등장해 세상을 바꾸길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우투리가 되어야 한다.
우투리의 결말은 베드 엔딩이다. 거대한 권력에 싸우는 일은 쉽지 않다. 당장 우리는 기업, 상사, 학교, 교수에게 대항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만히 있을수록 악순환은 계속되고, 불평등은 축적된다. 더 큰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 뿐이다.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점에 대한 해법은 다르다. 다만 자신이 가져야 할 문제점에 대한 의식은 같다.
사회를 살아가는 건 우리이므로 만든 것도 우리이다. 부패, 타락시킨 것도 우리이다. 따라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