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상경했을 때에는 기숙사에서 살았다. 7평 남짓에 데칼코마니처럼 반으로 접으면 똑같을 방 구조였다. 그와 다르게 나와는 정반대의 룸메이트와 지내게 되었다.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했다. 침대에 앉아 마주 보며 두런두런 얘기하다가도, 한순간에 각자의 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척을 해내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3년 반 동안 4명의 룸메이트를 거쳐서야 눈치라는 작자가 자라났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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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실험이라도 하려는 듯, 오래된 맨션 꼭대기 층에 위치한 쉐어하우스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사이 룸메이트는 6명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공유 주택이라는 명목하에 거실과 부엌 그리고 화장실을 함께 사용했다. 나의 방은 1인실이지만 독립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2인실과 커튼 하나로 분리되어 있어서 결국에는 눈 가리고 아웅인 격이었다. 밤마다 얕은 숨소리가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방 안도, 방 밖도 여전히 영역이란 애매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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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이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현재의 5평짜리 원룸에 정착했다. 하지만 얇은 벽은 내게 물 내리는 소리, 통화하는 소리, 코 고는 소리를 내어주었다. 고약하게도 나의 생활은 옆 방 주인에게 쥐어졌다. 그렇게 명확한 구분 없이, 명확하게 구분된 아이러니한 벽을 사이에 두고 2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어쩔 수 없이 여전히 공유의 삶이다. 내게 영역이란 그저 사치일 뿐인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적에는 줄곧 그 사치를 누려왔었다.
단독주택과 함께 딸린 마당과 밭 그리고 논. 땅문서로도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니 보이지 않는 선의 힘은 강력했다. 그러니 아무도 함부로 욕심내지 못했다. 대개 선 안과 밖을 구분 짓지 않던 건 오히려 부모님이셨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작물들을 자랑하다 못해 기어코 검은 봉투에 담아 양손 무겁게 돌려보내곤 했다. 선을 밟은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었지만, 부모님은 즐거웠으면 그만이었다.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 그것은 여전한 시골의 정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