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글로 표현하는 게 더 쉬웠다. 그래서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연필을 집곤 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감정과 달리 손은 천천히 옮겨졌다.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들이 종이에 안착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온종일 시끄럽던 가슴속이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누구한테도 글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래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을 빌렸다. 그때부터 자신감을 얻었다. 손끝에 힘이 실렸고, 날것의 감정에 날개가 달렸다.
처음에는 내 감정에만 집중했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소재가 되었다. 그렇게 ‘나’를 시작으로, ‘세상’을 마주했다. 욕심이 커졌지만, 여전히 손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글짓기는 단순한 기록 그 이상이다. 이제는 연필의 무게가 느껴진다. 말을 믿지 않는다. 현란한 입을 믿지 않는다. 느릿하지만 눌러쓴 자국에서 진심을 찾는다. 건넨 종이 한 장에서 의미를 다시 새긴다. 그 순간을, 사람을, 연필을, 그리고 읽는 나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