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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맹 환자의 공

연구의 탈을 쓴 자아의 발현


하지만 내가 무엇이길래. 내가 얼마나 잘 살았기에. 색맹 환자에게 빨주노초파남보의 색을 보게 해주는 마법과 같은 안경이 소포로 도착했을 때, 그 환자의 공은 과연 무엇이었던 걸까. 있기나 한 걸까.

 

나에게 공학을 가르쳐 주신 은사님들, 그분들은 이미 아셨던 것이다. 공학은 곧 삶을 바꾸는 경험 (life-changing experience) 이라는 것을 말이다. 막연히 “더 많은 기회가 있겠지”, 하며 떠난 이곳 보스턴에서 나는 더 넓은 삶을 맞이했다. 벅찬 삶, 이미 존재했으나 깨닫지 못해 누리지 못했던 삶.

 

오늘 하루를 대충 살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쏟아지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혈액 한 방울에 빛 한줄기를 쏘아 암을 조기 진단하는 기술 개발자들, 빛을 보다 먼 거리까지 전달할 수 있는 혁신적인 광 케이블을 만드는 엔지니어들, 벽에 케첩이 묻지 않고 부드럽게 나오는 신개념 케첩병을 만드는 학생들, 인명 구조 작업에 쓰일 미니 치타 로봇을 만드는 연구원들, 그리고 맥주 캔을 딸 때 뿜어 나오는 거품의 양을 줄여야 맥주 맛을 살릴 수 있다며 거품 줄이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학 과학 국어 영어의 세계를 넘어, 우리의 삶을 다루는 현실의 이야기. 학창 시절 내가 충분히 귀 기울였을 수 있었던 이야기, 그러나 이제 와서 들리기 시작한 그 이야기들. 

 

사람들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교수님들께 컨택 이메일을 적었다. 나를 만나 달라고. 여쭤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박사 때 이 공부를 하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그 문제를 풀려하시는 다른 교수님들은 또 어떤 분들이 계신지, 이 분야가 내가 요새 팔로우하던 요 분야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가 날 수 있을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다. 전날 밤 샤워할 때 연습해간 영어가 도움이 됐다. 

 

잡지를 읽었다. 뉴스를 시청했다. 세미나에 참석했고 네트워킹 이벤트에 참여했다. 세상은 실로 넓었다. 매일 같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였는지를 실감했다. 교과서를 보고 공만 차던 어린아이가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학생 경진대회 최종 발표 이벤트가 있으면 청중으로 참석해 사람들의 피치를 들으며 나만의 심사를 했다. 청중 질문 찬스를 활용해 내 생각을 말하고, 그들의 생각을 들었다. 너무나 재미있었다. 축구 말고도 나와 찰떡 같이 잘 맞는 그런 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밤을 새워서라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들은 연구의 탈을 쓴 내 자아의 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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