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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파노 Jan 31. 2020

명절 음식이 너무 싫었다.

어려서부터 명절을 싫어한 이유를 서른이 넘어서 이해했다.

 2020년의 설에는,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호텔에서 명절을 보냈다.

 외국에 나와 사는 입장에서 집에 있으나 호텔에 있으나 설이라는 게 피차 의미는 없다만, 그래도 설인데 라는 생각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가보로네에도 이런 전망을 제공하는 호텔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설과 추석은 피곤했다. 먹지도 않을 음식을 만들었고, 한상 가득 차린 음식에는 정말 손도 대지 않았다. 단순히 내 취향이 아닌 음식이기도 하지만, '이제 명절은 간단히 합시다'라는 꾸준한 주장에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 엄마에 대한 반항이었다. 가장 고생을 하는 건 엄마지만, 그녀는 차례와 제사를 꼬박꼬박 지낼 예정인 것 같다.


 내가 대학생일 때, 남들도 그랬듯이 자취를 했다. 다들 그러하듯 명절엔 집을 찾았다. 명절이 끝나고 자취방으로 돌아갈 때 엄마는 동그랑땡이며, 잡채며 바리바리 싸주었다. 난 옆에 서서 '안 먹는 음식이다. 여기서 안 먹는 걸 자취방에서는 먹겠냐'며 만류했다. 그래도 엄마는 고집스럽게 음식을 싸줬다. 현관에서 쇼핑백에 이미 담긴 음식을 확인하고는 다시 꺼내 냉장고에 넣는다고 실랑이도 벌였다.

 자취방에 돌아와 음식들을 냉장고에 처박고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한 2주쯤 지나면 쉰내가 났고 그제야 버렸다. 차마 새 음식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것은 엄마에게 미안한 일이었으므로 그러지 못했고, 이미 상한 음식을 버리는 것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마땅히 버릴 수 있었다. 철부지 대학생이 자취를 했으니 미리 사둔 식재료가 없어서 배를 곯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나 조금씩 제삿밥과 차례 음식에 손을 댔지, 그 외에는 언제나 버렸다. 음식을 버리고 나면 그릇을 씻어서 찬장에 넣어두고는 방학 때쯤이나 되어서 다시 꺼내 집에 가져갔다. 매년 그랬다. 


 첫 직장은 집에서 멀지 않았다. 자가용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다녔고 50분쯤 걸렸다. 친구들은 차를 먼저 샀지만 나는 전셋집을 구했다. 대학생 때 하던 일이 반복되었다. 명절이 되기 이틀 전쯤 먼저 가서 청소를 어기적 어기적 했고, 목기 따위를 대충 닦았다. 엄마가 장을 봐 오면, 왜 이렇게 많이 사 오냐며 따졌다.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면, 먹지도 않을 걸 왜 이렇게 많이 만드냐고 잔소리를 했다.




 명절 당일이 되면 아침에 큰집으로 갔다. 큰집에는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계시고, 사촌 형 셋과 형수님, 거기에 조카들까지 복작한 편이다. 거기도 음식이 한상 가득했다. 예의 상 몇 젓가락 먹기는 하지만 역시나 거의 먹지 않았다.


 내가 유치원생일 때, 그러니까 큰아버지 댁이 마당이 있는 시골집이던 시절에, 아버지는 마당에 있던 감나무에서 장대로 감을 따기도 했었다. 이제는 아련한 기억만 남은 그 옛날에도 나는 큰집 음식을 먹지 않았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지만, 큰집 식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차게 식은 전에서는 기름 쩐내가 났다. 퍽퍽한 고기 산적이 싫었다. 지금은 잘 먹지만 그때는 먹지 않았던 파나 생강 같은 향신료를 많이 쓰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송편에 깨가 아니라 콩을 넣는 게 너무도 싫었다. 반투명한 떡 반죽 넘어로 소가 어렴풋 비치 곤 했는데, 콩을 넣은 건 밝은 색이고 깨를 넣은 건 더 어둡다는 걸 알아챈 건 중학생이 지나서였다. 큰집에서 내가 먹던 건 쌀밥 한 그릇에 고깃국 정도가 다 였다. 큰집에선 김치도 먹지 않았다.


 보츠와나에 오기 직전 해에도 명절 아침이 되면 큰집으로 갔다. 이제는 큰어머니, 큰아버지 모두 연로하신 까닭에 사촌 형과 며느리들이 음식을 했다. 며느리가 아니라 형수님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어쩐지 명절엔 며느리만 있고 형수는 없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때도 제사상에 오른 음식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예의상 형수님들께 맛있다고 몇 마디만 했고, 국에 밥을 말아먹었다.

 그러고는 우리 집으로 온다. 작은 집이라고 차례를 안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촌 형 셋과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온다. 또 차례를 지낸다. 또 밥을 먹는다.

 보통은 11시가 되기도 전에 두 끼를 먹었다. 집에서는 이것저것 반찬을 꺼내 먹었지만 역시 제삿밥(차례상 음식)에는 손대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면 엄마는 과일을 내왔고, 뉴스를 켰다. 명절 뉴스는 언제나 비슷했다. 사촌형들은 이것저것에 대해 이야기 했고, 엄마는 사촌형들과 큰 목소리를 대화를 나눴다. 나는 대체로 말을 하지 않았고, 묻는 말에만 대꾸하는 편이다. 형들은 보통 12시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에 친구들과 즐겁게 밥을 먹을 때면 잔반 처리 담당은 항상 나였다. 음식 남기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도 나였다. 혼자 있을 땐 '대충 때우고 말지 뭐' 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식을 섞어 놓고는 우적우적 먹기도 잘했다. 보츠와나에 와서야 음식 만드는 데 재미가 붙어 이것저것 해 먹어 보기도 하고, 맛의 조화라는 것도 알게 된 편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잘 먹었고, 먹는 양도 많았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먹성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명절 음식들은 못 견디게 싫었다. 제삿밥이라는 말도 꼴보기 싫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명절 음식이 아니라 명절이 싫었던 것이다. 서른이 넘은 지금에서는 마침내 소통 가능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도 말하지 못했을 뿐 나름의 이유로 명절이 싫었던 것이다.


 혈연이라는 사람들은 출생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30년이 지나도록 친해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친해지려는 노력을 그만해도 좋을 것 같다.

 엄마는, 나에게 엄마는, 힘든 사람이었다. 많은 일을 하느라 힘들어했고,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며 아들은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대학생일 때 충분히 통학이 가능한 거리였자만, 구태여 자취를 했다. 내 돈도 아닌데 엄마를 졸라 자취방을 마련했다. 처음으로 혼자 살았고 홀가분했다. 그 홀가분함이 너무 좋아서 '두 번 다시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지 않을 것이야'라고 남몰래 다짐했다.

 직장을 갖고는 보다 쉽게 다짐을 지킬 수 있었다. 직장 동료들은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선생은 혼자 살아?'라고 물으면 나는 '네'라고 답했다. 연세 지긋한 선생님들은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나는 대전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대부분의 동료들은 '집이 대전인데, 대전에서 자취를 하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취지의 말들을 했다. '어머니가 서운해하실 거라며', '돈 아껴야지' 등의 말씀들을 주셨다. 이런 말들을 귓등으로 들었다.

 군대를 가서는 편했다. 명절을 부대에서 지내며 홀가분해했다. 다른 병사들은 명절에 맞춰 휴가를 나가려고 했지만 난 명절을 피해 휴가를 썼다.

 대학원에 가서는 바빴다. 실제로 바빠서 잠을 못 자는 날도 많았다. 명절에는 교수님도 당연히 쉬셨지만 나는 엄마에게 전화해 명절에도 바쁘다고 둘러댔다. 바쁨을 과장하여 명절에 내려가지 않았다. 학교 구내식당에서 급식을 먹었고, 버스를 타고 나가 영화를 봤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책도 읽었고, 캠퍼스를 뛰기도 했다. 그리고 묵혀 둔 도전적인 논문을 꺼내 명절 내내 용써가며 읽었다. 아마 핑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던 것 같다.


 혈연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 못함을 이제는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있다. 어렸을 때는 이런 것을 말로 풀어낼 수 없었다. 큰집에 가는 일이 막연히 싫었고, 명절이 되면 괜히 짜증을 냈다. 어렸을 때와 다르 게 지금의 나는 학교에서 공부도 했고, 책도 읽었고, 영화도 본 성인이다. 이제는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풀어쓸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불편하고, 친척은 무관심의 대상이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발언이지만, 이제는 이런 비난을 귓등으로 들을 수 있다. 귓전에 맴도는 작은 소리가 더 신경 쓰이듯이 관심을 아주 끊어낼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런 소리에 압도되지 않을 만큼의 힘은 생겼다.




 명절 음식을 먹지 않았던 건 그들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었지, 음식을 가리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알아차린 것이지만 10살도 안 되었던 그때부터 나는 혈연들이 불편했던 것 같다.

 친지들과 어떤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사이가 틀어진 것이라면 '그때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귀인하겠으나 딱히 그런 일은 없었다. 친척들은 대소사 때 협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표면적으로는 매끄러운 가족 모임이지만, 그들과의 모임이 편안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매년 명절이 불편했고, 사촌 형들의 결혼식을 앞두고 가족 모임이 있을 때도 불편했다. 엄마의 환갑을 맞이하며 가장 걱정했던 건 아마 '이 불편함을 도대체 몇 시간이나 견뎌야 할 것인가' 였던 것 같다.


 엄마는 나를 키운다고 고생했다. 고되게 일했고, 아끼며 사셨다. 엄마는 '엄마가 고생한 거 너만 알아주면 된다'라고 자주 얘기했다. 그래서일까, 엄마를 향한 나의 정서는 죄책감이다. 푸근함이라던지, 안정감이라던지 잘 모르겠다. 고등학생일 때 문학 공부를 하다 보면 고향, 어머니, 그리움 등의 주제가 빈번하게 나왔다. 난 잘 공감하지 못했고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 고민도 했었다. 그러다 교과서에 실린 이청준의 '눈길'을 읽었다. 소설 속 주인공도 어머니를 불편해했고,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의 훗날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르겠다며 걱정하는 동시에,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정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교과서가 요구하는 해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는 '어머니에 대한 불편함'이 타인에게도 이해받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위안을 받았고, 안심하기까지 했다.


  이제 나는 서른이 넘었고, 엄마는 늙어간다.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바뀌었다. 그만큼 집에서 나의 영향력은 세졌다. 명절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는 데 성공했고, 양을 줄이는 데도 성공했다. 아무래도 효도는 못 할 것 같다. 다만, 책무를 다 하려고 한다. 좋은 아들보다 괜찮은 채무자가 목표다.


 다음 명절에는 여행을 보내드릴 계획이다. 몇 년째 차례를 지내지 말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녀는 '어떻게 차례를 안 지내냐'며 타박을 했다. 하지만 내년 설에는 꼭 여행을 보내드릴 계획이다. 내가 동행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여행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명절을 대신할 예정이다.




http://kopanobw.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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