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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돌책깨기 Feb 22. 2021

죽은 경제학자 불러다 이야기 듣기(2)

두 번째 낭독, 경제학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의 재림(후반부)

일시: 2021년 2월 17일(수) 2회차 낭독

책: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토드 부크홀츠 저)

읽은 부분: 2장 <경제학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의 재림> 중 '보이지 않는 손, 자유시장의 작동 원리 ~ 애덤 스미스의 재림'

참석자: H가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함께하지 못했다. 아쉽아쉽. 경제학을 제일 잘 아는 H의 빈자리를 메꿔보고자 Y, J, K가 모여 머리를 더 쥐어짰다. 

(*벽돌책 깨기: 의도치 않게 인원이 4명으로 굳어진 덕에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임에도 가까스로 모일 수 있는 소규모의 소중한 낭독 모임)


오늘 쌓은 벽돌들


애덤 스미스의 성장이론: 

스미스는 노동을 경제성장의 주요 엔진으로 보았고 

(1) 노동력 공급이 증가할 때

(2) 노동이 분화될 때

(3) 새로운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의 질이 상승할 때 

경제성장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투자 아이디어와 발명이 계속해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유로운 교역이 허용되는 한, 경제는 꾸준히 성장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으로 일반 국민들이 높은 생계 수준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p.86)


- (오늘 읽은 내용 중) 탈규제 때문에 IT가 발전했고, 그로 인해 기술발전을 하지 못한 다른 나라들까지 수혜를 입었다는 건 맞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우리가 원했던 행복인가?를 질문하면 아닐 수도 있는 거다. 이 질문은 물론 경제학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자꾸만 가치판단이 들어간다. 


- 맞다. 어떤 저항이 있는 거다. 자유주의 무역을 하고 자유경쟁을 하면서 전체 부는 계속 증가했는데 빈부격차가 심각해진 상황을 지금 결과로 받아 들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우리가 똑똑히 보고 있으니까. 


-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진공 상태에서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설명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돈 있는 자들과 착취와 이런 것에 대한 배경을 다 블라인드 처리하고 그래프와 합리적인 무언가만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처럼 설명함으로써 가진 자들의 이득을 대변한다는 통념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날것 그대로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자기의 욕망을 풀어헤치면서 그 안에서 자연스러운 '가격'을 가져가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찜찜함이 남는다. 


- 스미스의 위대한 점은 그렇게 날것 그대로를 바라보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시장이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관점. 자유를 극대화했을 때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 


- 공공선의 문제. 어떤 산업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이 나쁜 영향을 끼쳐서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공공선이 아니다. ex) 카지노. 이런 산업에 세금을 더 매겨서 재분배해야 한다. 그런데 윤리적인 문제라 그 기준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차이나는 클라스> 마이클 샌델 편 참고)


- 분배 문제는 정치의 영역이다. 흔히 낙수효과를 이야기하는데, 성장이 이루어지고 이후 제대로 분배가 되지 않으면 정치가가 잘못한 것 아니냐고 한다. 


- 그래서 한 정치학자는 정치를 이렇게 정의했다.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분배다."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

가장 유명한 예. 사람이 셋 있고 앞에 파이가 하나 있다. 이 파이를 어떻게 나눠 먹어야 셋 다 불만이 없을까? 셋 중 한 사람이 나눠준다면 이 권위는 어떻게 부여될까? 이것이 정치다. 


- 애덤 스미스는 결과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이후 세계는 작은 정부 -> 큰 정부 -> 작은 정부의 반복 사이클로 움직이고 있다.  


Y의 재미있는 이야기 - 애덤 스미스를 끝내며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또는 빵집 주인의 자비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 즉 돈벌이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한 경제학자가 있다.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정육점 주인의 고기와 양조장 주인의 술과 빵집 주인의 빵을 갖다놔 봐라. 당신이 그걸 그냥 먹을 수 있느냐. 누군가의 노동으로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것을 아예 노동으로 보지 않은 것 아니냐. 당신은 화폐로 교환 가능한 것만 노동이라고 본 것이다. (스미스는 평생 독신이었고 어머니가 요리해주고 청소해줌) 어머니의 노동은 화폐로 교환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럼 화폐로 교환 가능한 것, 즉 노동은 누가 정했느냔 말이다. 왜 똑같은 노동인데 어떤 노동은 화폐로 교환되고 어떤 노동은 화폐로 교환되지 않느냐. 집에서 하는 돌봄노동은 자연화되어서 원래 해야 하는 것, 당연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노동이라고 보지 않은 것 아니냐. 이렇게 경제학의 탄생에서부터 여성의 노동, 일은 누락되고 삭제되었다. 


그렇네요, 스미스 씨. 


정리ㅣKHK


찾아볼 것들 

<차이나는 클라스> 194회 마이클 샌델 편 

데이비드 이스턴의 정치론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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