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기장
'내가 하루라도 벌지 않으면 안 된다.'로 시작되어 '너무나 힘이 든다'로 끝나던 엄마의 일기를 기억한다
엄마의 떨리는 음성을 기억한다
매일의 기록은 아니었다
엄마가 시장으로 장사를 나가지 않는 규칙적이지 않은 엄마의 휴일이 무료해지는 날이었던 거 같다
엄마는 이웃해 살고 있는 큰 이모님 댁에 가서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이종언니를 데려오라고 심부름 보냈다
그때 이종언니는 당시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재수생이었다
이종언니를 데려오면 엄마는 엄마의 서랍에서 얇은 미색의 매끈한 노트와 볼펜을 내어왔다
심드렁하니 받아 든 이종언니는 엄마가 펼쳐준 백지의 노트에 엄마의 음성일기를 받아 적었다
처음부터 이종언니의 표정이 심드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 번의 부름으로 받아 적는 일기의 내용이 자신의 감정에 취한 엄마의 떨리는 음성으로 매번 거의 비슷한 내용을 읊으셨다 엄마의 넋두리이자 신세한탄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나도 암기하는 내용이라 십팔 세 소녀인 이종언니에게는 따분했을 것이다
자기애에 빠진 엄마가 길게 뜸을 들이면 지루한 이종언니가 뒷얘기를 이어준다 그러면 엄마는 만족해하며 좋아했었다 ㅡ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ㅡ하는 것처럼
그때는 나도 조마조마하며 그 문맥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간간이 이종언니의 짜증 나 하는 찌푸린 얼굴을 보고 엄마의 떨리는 신세한탄 같은 음성일기를 그냥 모른 척 듣고 앉아 있었다
우리 엄마가 힘들구나 슬프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ㅡ 그걸 자식에게는 직접 말을 못 하시구나 했었다
그런데 그걸 딸이 있는 앞에서 딸보다 다섯 살 많은 조카에게 하소연하듯 넋두리하듯 쓰게 하고 있는 거다
나도 쓸 줄 아는데 하는 서운함보다는 엄마가 짜증 나 하는 이종언니의 표정을 볼까 봐 나는 더 조바심이 났다
엄마가 또 슬플 거 같아서
엄마도 읽고 쓸 줄 알았다 술술 잘 읽고 쓱쓱 잘 쓰는 게 아니라 더듬더듬 느리게 삐뚤빼뚤했어도..
당연히 당시 국민학교 오 학년 즈음인 나도 읽고 쓸 줄 알았다 큼지큼직하다 작아졌다 질서 없는 나의 글씨체는 엄마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종언니의 글씨체는 반듯하고 단정했고 이뻤다
경제력 없는 남편에 당시에는 네 자매의 어미로 짊어져야 할 엄마의 고충을 잠시나마 위로가 되려면 글씨체라도 반듯하고 질서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사는 게 힘이 들어 쉬자는데 글씨체까지 삐뚤빼뚤 어지러우면 더 심란스러웠을 것이다
엄마가 딸을 두고 조카에게 일기를 받아쓰게 한 것은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였을 것이다
엄마는 외로웠던 거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삶의 무게보다 얼굴 마주 보고 마음 털어놓을 사람이 그리웠던 거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마음으로라도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밖으로 도는 남편 따라 엄마의 시선도 언제나 집 밖으로 멀리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엄마의 어린 자식들은 엄마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엄마는 왜 우리를 삶의 무게로만 여겼을까
이쁘지 않은 글씨체라도 자신의 딸에게 신세한탄하듯 읊조리며 받아쓰게 하고 받아쓰는 어린 딸을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을까
어렸지만 어린 동생들과 집지킴이로 엄마는 나를 의지하기도 했었는데ㅡㅡ
글씨체라도 같이 성숙했더라면 엄마는 나에게 회포를 푸셨을까
무거운 삶의 짐보다 많이 외로웠을 우리 엄마
오랫동안 엄마의 서랍장에 있던 얇은 미색의 채워지지 않은 엄마의 일기장이 지금도 내 기억 속 서랍장에서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