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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Feb 24. 2023

비 오는 날엔 우산을 던져라

눈초리 속에 우정은 싹튼다

1.

그 조합은 참으로 이상했다. 

모범생 반장, 까칠한 우등생, 특이한 영심이, 약간 노는 인기녀, 소문난 날라리, 존재감 없는 소심이. 

접점 하나 없는 이들은 어떻게 친해졌을까?

이 사건의 배후는 다름 아닌 그녀, 그들의 담임선생님이었다. 딱 부러지고, 카리스마 있으며, 시니컬한 농담을 즐기던 그 선생님은 서울 한 자락에 자리한 중학교의 수학 선생님이었다. 


학기 초만 해도 이들에게는 서로 친한 친구들이 있었기에 지나칠 때 웃음은 건넬지언정 정은 주지 않았다. 고만한 또래 여학생들이 그렇듯 그들 역시 자기 무리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이미 형성된 무리에 누군가를 끼워주는 건 몇 날 며칠 열띤 토론을 해야 할 만큼 어렵고 진지한 일이었다. 

중딩 소녀들은 체육을 마치고 교실로 가는 좋아하는 남학생 이름을 크게 부른 뒤 창문 뒤로 숨고, 영원한 우상 덕화 오빠가 나오는 비디오를 보며 소리를 지르고, 선생님 몰래 HR(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돌려 읽으며 조금씩 커갔다.     


여름 방학을 앞둔 어느 날, 평소에도 특이했던 담임선생님은 이해 못 할 말을 하셨다. 본인은 방학 중 매일 출근을 할 예정이며, 담임이 등교하는데 학생도 등교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반 아이들에게도 매일 등교를 권하셨다. 물론 각자에게 선택의 여지는 주어졌다. 하지만 그 선언 이후 몇몇의 아이들이 하나둘 교무실로 불려 갔고, 선생님은 그 아이들에게 두말 말고 매일 등교할 것을 명하셨다.      

“방학 때 집에서 뭐 할 거야? 할 것 없는 거 아니까 학교 도서관에 나와서 책 정리도 하고 공부도 해. 연합고사 공부하는 셈 쳐.”

“선생님 저 방학 내내 나오는 건 좀 힘든데요. 방학인데 늦잠도 자고 놀기도 하고……. 나름 저도 바쁜데요.”

“됐어. 그만치 놀았으면 됐지 뭘 어떻게 더 논다는 거야? 그냥 나와.”   

  

학교 도서관 담당이었던 선생님은, 방학 중에 도서관에 와서 책 정리도 하고 연합고사 준비도 하고, 각자 한 과목씩 맡아 공부를 하고 친구들에게 가르치는 경험도 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방학 마지막 날에는 아이들이 직접 기획하고 준비한 우리만의 축제를 열어도 좋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 부름을 받은 아이들 외에 다른 아이들은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지금처럼 학창 시절을 학원에 메어 지냈던 때가 아닌지라 특별한 부름을 받은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매일매일 등교를 했다.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부딪히며 다투기도 했고, 세상 시름없이 웃기도 했다. 평소라면 절대 친해질 수 없었던 아이들은 그 여름 동안 서로의 곁을 내주며 친구라는 이름으로 관계가 깊어져 갔다.     

     

2.

혈기왕성한 아이들에게 여름날 장마는 지루했다. 어느 날 아침 등교 전 반짝 해가 비쳤다. 반장, 우등생, 소심이는 혹시나 비 올 걱정에 우산을 챙겼고, 영심이, 날라리, 인기녀는 가벼운 손만큼 가벼운 발걸음으로 등교를 했다. 하지만 장마는 장마라고 집에 갈 즈음 여지없이 비가 쏟아졌다.   

  

날라리가 말했다. “나 우산 없어. 근데 치과도 가야 돼.”

소심이는 말했다. “내가 우산 씌워줄게. 나 어차피 병원 가는 길로 집 가니까.”     


날라리, 영심이, 인기녀는 우산 있는 친구들의 우산을 같이 받쳐 쓰고 학교를 나섰다. 그런데 비는 생각보다 굵었고 우리는 금세 젖기 시작했다.      


날라리가 말했다. “나 그냥 비 맞을래. 어차피 치과부터 집까지는 비 맞고 가야 되는데 멀.”     


그리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날라리의 용감한 모습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산을 접고 날라리에게 뛰어갔다. 학교부터 치과까지 1km 남짓을 우리는 팔짱을 끼고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는 어른들은 혀를 차며 우리를 쳐다보았지만 그런 눈초리 따윈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함께여서 용감했고, 함께여서 즐겁기만 했다. 물론 즐거운 우리 맘과는 달리 간호사 선생님은 우리가 달갑지 않았나 보다. 치료를 받을 날라리를 제외하고 모두 병원 밖으로 쫓겨났지만 그래도 서로를 보고 웃었다. 비에 흠뻑 젖은 만큼 우린 우정이라는 이름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비가 내릴 때면 그 추억에 행복했다.     


3.

당시 선생님의 나이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린 제자는 미루어 생각해 본다.

선생님의 눈에는 그 아이들이 가진 결핍이 눈에 보였던 건 아니었을까? 착하고 똑똑하지만 너무 순한 아이, 공부는 잘하는데 사회성은 약간 떨어지는 아이, 특이해서 왕따 당하기 딱이었던 아이, 옆에 있는 친구가 누구냐에 따라 날라리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았던 아이, 학교에서 알아주는 문제아지만 사실은 ‘나를 봐주세요’라며 절규하던 아이, 소심하고 위축되어 눈치를 보던 아이. 이 아이들을 어울리게 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짐작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선생님의 사심 가득한 여름 방학이 지나고 소심이와 친구들은 평생 함께 할 친구들을 얻었다. 가끔 비 오는 날에 우산을 집어던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런 친구들 말이다.

 


* 사진은 픽사베이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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