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내 공간 만들기
며칠 전 남자친구가 2년간 머물었던 방을 비웠다. "마지막인데 어때?" 툭 내뱉은 질문에 남자친구는 울컥했다. 어디서든지 의미를 끄집어내기 좋아하는 내가 담담한 척하는 남자친구의 아쉬움을 들췄나 보다. 가뜩이나 작은 방을 어두컴컴하게 만드는 이상한 검은색 커튼에, 인테리어라 할 거 없이 선물 받은 전등과 디퓨저를 여기저기에 놓아둔 모양 하며, 가만히 샤워만 해도 휴지가 다 젖을 정도로 비좁고 곰팡이가 잘 드는 화장실. 도통 마음에 들 만한 구석이 없었는데도 무척 아쉬웠다. 주인도 아닌 내가 이렇게 아쉬워도 되나. 나뭇잎이 그려진 좌식 테이블에서 몇 끼의 밥을 먹었고, 얼마나 많은 음식을 흘려 깔끔한 남자친구의 눈치를 봐야 했는지 모른다. 상극의 체온을 지닌 우리가 에어컨과 선풍기를 켜네 마네 하며 싸웠던 이 방의 두 번의 여름을 떠올리고 있자니 나는 또 한 번 내가 사랑했던 공간을 놓아줄 때가 됐음을 실감했다.
지난겨울 처음으로 몹시 사랑했던 공간을 보내주는 경험을 했다.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머물었던 여러 방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편안했고 그리워하는 공간들이다.
- 5개의 층. 각 층은 다시 두 개의 플랫으로 나뉘고 이는 또 5개의 방으로 나뉜다. (영국식 플랫이란 개념은 참 복잡하다) 아무튼 나는 4층 7D라는 방에 살았다. 본래 놓여있던 갈색의 가구들과 초록의 의자. 나는 그 둘을 이어 줄 색깔로 회색 이불을 깔았다.
책장의 첫째층은 내 간식 창고다. 놀랍지만 난 한국에서 절대 간식을 구비해 놓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달달한 비스킷과 짭짤한 감자칩을 최소 두 종류씩은 사놔야 마음이 놓인다. 위층들에는 내가 사랑하는 프렌즈 물건들이 놓여있다. 프렌즈 달력과 보드게임. 영국에 오면 해리포터나 셜록의 팬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게 웬걸, 프렌즈에 더 집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창문 앞에는 주로 혼자서, 가끔은 친구들과 함께 마신 술병들을 보란 듯 세워놨다. 파티 후에 빈 병을 일렬로 전시해 놓는 영국 친구들을 보고 부러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같은 빌리지에 사는 친한 친구들이 모두 여행을 떠났을 때엔 허전한 마음에 며칠 불면증을 앓았다. 그때쯤 크리스마스의 색을 풍기는 꽃을 화병에 꽂아 머리맡에 뒀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일기에 정신없이 생각을 나열하고, 두서없는 언어를 김영하의 에세이로 (여행의 이유) 정리하고 나면 들뜬 마음은 금방 정리가 된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던 때의 창밖을 기억한다. 운 좋게도 이 방 창문은 커다란 초록 나무 한 그루가 장악하고 있었다. 오후 5시 즈음이면 햇빛의 움직임에 맞춰 나뭇잎의 그림자가 방 안 하얀 벽에 회색의 무늬를 만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가만히 이불속에 쏙 들어가 그 일렁이는 나뭇잎의 물결을 바라봤다. 그림자가 벽에 비치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덧 11월이 되었을 때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희미한 그림자만 남았다. 그때쯤엔 나도 곧 이 방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내 마음은 나무의 변화에 심히 감정이입하고 있었다. 봄과 여름의 이곳은 어떨지 제멋대로 상상하며 빈 나무를 채웠던 그때의 허전함이란.
- 두 번째는 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에서 머물렀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한인민박이다. 4인이 쓰는 민박이지만 이틀간은 혼자서 지냈다. 행운이다.
4개의 침대에는 저마다 다른 이불이 깔려있다. 선택권은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덮은 이불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원색을 좋아하는 우리 집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그런 이불이다. 길거리 이불집에서 흔하게 보지만 한 번도 내 타입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그런 종류의 꽃무늬 이불이었다.
1월의 에든버러는 내 예상보다 훨씬 추웠다. 차가운 바다 바람이 짧은 티셔츠 사이로 들어와 맨 배꼽을 시리게 만들었다. 두꺼운 목도리라도 칭칭 동여매고 첫날 스코틀랜드의 멋진 노을을 보러 칼튼 힐로 올라갔다. 가장 높은 곳, 널찍한 언덕에서 매서운 바람은 온통 내 몫이었다. 어찌나 으슬으슬하던지 내려오자마자 뒤돌아보지 않고 저녁밥이 차려진 민박집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영국에 와서 한식을 그리워했다면 거짓말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아시아 친구들과 일주일에 4번은 맛난 쌀밥과 매운 찌개를 끓여 먹었다. 그렇지만 나는 왜 이 밥상이 이렇게나 감동이었을까. 스코틀랜드에서 명이나물 장아찌를 먹게 될 줄이야.
영국의 전력난으로 난방을 세게 틀지 못하는 숙소는 무척 추웠다. 사장님은 따땃한 난방 대신 1인용 전기장판 하나를 깔아주었다. 소화도 시키지 않은 채 이불속에 떠밀려 온 나는 황급히 계획을 수정했다.
원래는 저녁을 먹고 근처 펍에라도 가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대신 1분 거리 슈퍼에서 싸구려 무스 디저트를 사 왔다. 그때가 겨우 저녁 8시였다. 여행에서 침대에 눕기엔 무척 이른 시간이다. 그렇지만 아쉬움보다는 앞으로 이 따뜻한 이불 안에서 뒹굴 거릴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그저 설레었다. 누군가는 내 여행담을 듣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라 해도 이해가 된다. 돌아오는 길의 서점에서 구입한 두 책 중 무엇을 먼저 볼까 고민하는 시간을 무한정 늘려도 되는 그날의 여유가 어떤 여행의 깨달음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날만큼 책 한 면을 느리게 정독한 적은 없다.
여즉 그 방의 꽃무늬가 아른거린다. 또 나를 가두던 기숙사 방의 나뭇가지가 그립다. 그 공간들의 매 순간이 아름다웠던 건 단지 그곳들이 매력적으로 꾸며졌기 때문일까. 그렇다기에 민박집의 내 영역은 겨우 1평 남짓의 이불보가 전부였다. 뒤돌아보면 장소가 매력적이어서 그 속의 순간들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곳에서 보낸 나의 순간들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장소가 매력적인 거였다. 처음으로 갖게 된 나의 독립공간이 주는 해방감, 일상의 의무들에 얽매이지 않는 여행자의 자유, 예상할 수 없는 내일이 주는 설렘, 혼자라서 갖는 불안과 그걸 극복하고 난 후의 성취감. 그곳들을 떠올리면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편안한 감정의 덩어리가 다른 시간과 다른 곳에 있는 모든 나를 그곳의 나로 이끈다.
단 며칠 머문 방에도 쉽게 마음을 내어주는 내게 17년이나 살았던 우리 집을 그 정도로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음, 사랑해야 할 것 같다 (내 집이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집에 머무는 내가 그다지 마음에 안 들 때가 많았다. 나태하고 게으른 나. 당연하게 먹고 자는 곳, 질리도록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는 곳 이상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래도 먼 길을 떠나 있을 때 우리 집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걸 보면 그 나태함 안에 내가 알지 못한 어떤 여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사실 그 여유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릴없이 먹고 자는 시간들 사이에 어떤 감정이 숨어있었건 걸까. 내가 놓친 이 집의 정서는 어떤 모양일까.
공간을 사랑하려면 적극적이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인테리어 용품을 사들이라는 게 아니라, 그곳의 나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정의하고, 그 감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 장소에서 느낀 편안함이 온몸에 와닿다 못해 밖에서까지 나를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그렇게 진정으로 '내 공간'이 생겨난다.
'아 집에 가서 쉬고 싶다.' 이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파블로프의 개가 될 때까지 누벼보는 거다. 현실적으로 집을 세 채나 살 수는 없으니 집 같은 공간 여럿 마음에라도 품어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