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입맛만큼 고집 세고 분명한 특징이 있을까.
할머니, 할아버지에서 시작해 엄마와 아빠가 좋아하게 된 맛은 그들의 손끝을 거쳐 나의 기억과 감각에 각인된다. 혀는 우리 몸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관이라 한다. 새로운 맛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혀는 한번 익숙해진 맛을 평생 기억한다. 우리의 삶은 바뀌어도 우리의 입맛만은 쉽게 바뀌지 않는 건 살아남기 위한 신체의 투쟁인 셈이다. <H마트에서 울다>의 저자 미셸 자우너에게 입맛은 또 다른 의미의 투쟁이었다. 그녀에게 입맛은 엄마를 잃은 거대한 상실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탕에 있는 건 단연 ‘가족’이다. ‘흡사 나무 한 조각을 깎아 만든 것처럼’ 서로가 꼭 연결되어 쉬이 끊을 수 없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주는 가족의 유일함은 우리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며, 내가 있어서 그들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새로이 겪는 경험과 관계들은 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마구 흔들어댄다. 미셸에게 그 시간은 유독 혹독했으니,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불안과 그 불안의 표출구였던 음악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엄마는 항상 '이렇게 입고, 이렇게 행동하며,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라'고 간섭했다.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어떤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채 타자로 배척되던 그 시기에, 언어도 문화도 온전히 통하지 않는 엄마와의 소통은 불완전했고, 이내 그녀는 엄마의 사랑마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다.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
야속하게도 이 말이 내게 진심이던 때가 있었다. 먹고 싶은 반찬이 있는지 지겹게 물어오며 정작 나의 세계가 얼마나 시끄럽고 복잡한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언젠가 소화될 음식들로 매일의 낙을 찾는 엄마의 인생이 그저 얄팍해만 보였다. 이기적인 욕심, 이렇다 할 꿈도 없이 사는 엄마를 감히 동정하며 엄마가 해 온 모든 역할, 나를 존재하게 한 엄마의 지난한 헌신과 사랑을 종잇장처럼 짓눌렀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땀을 뻘뻘 흘리며 내 생일을 위한 미역국과 잡채와 갈비찜을 부엌 한구석에서 준비하던 엄마의 마음의 크기가 가늠이 되었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 마음이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에 책임을 다하는 건 웬만한 사랑으로는 택도 않은 일이다. 딸의 모습을 날마다 카메라에 담고, 딸이 아파하지 않도록 미리 신발의 길을 들여놓은 사랑이 엄마의 원대한 삶의 동기이자 축복이었다는 것을 미셸은 이제야, 엄마가 암으로 인해 '죽어가기'와 '살아가기' 중 하나를 택할 권리조차 잃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미 이모가 말했듯 가족이라는 끈은 핏줄(blood ties)을 통해 이어져 언제나 정체성의 한 구석을 이룬다. 그럼에도 내 가족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땐 나의 근원이 송두리째 증발해 버린 듯 느껴진다. 나의 존재를 증명해 줄 누구도 없이 한순간에 유기되어 버린 기분. 그 기분을 거뜬히 견뎌낼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일종의 '의식'을 취한다. 나의 아빠는 보름마다 할머니가 모셔진 납골당을 다녀오신다. 그렇게나 자주 뵙고 싶을까. 그곳에서 아빠는 어떤 방식으로 할머니를 마주할까. 조용히 기도를 되뇔지, 할머니와의 바랜 추억을 소환하며 펑펑 눈물을 흘릴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유만은 알 것 같다. 미셸에게 그 의식은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증발해 버린 엄마와의 시간을 결코 잊지 않으려 그녀는 한국 음식을 찾았다.
아기들은 본능적으로 ‘엄마’를 부른다. 이 말에 웃는 엄마의 표정이 좋아 목구멍 얕은 곳에 그 말만은 항상 준비해 놓은 채 언제든 엄마를 찾는다. 한국 음식을 잘 먹는 미셸의 모습을 보며 ‘얘는 정말 한국인’이라고 말해주면 엄마와 하나가 된 것 같아 좋았을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통의 순간마다 미셸은 음식을 통해 엄마와 교감했다. 미셸에게 한국 음식은 ‘엄마’라는 울부짖음처럼 엄마를 찾기 위한 본능이다.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수많은 음식이 있다는 건 어쩌면 큰 행운일지 모른다. 엄마의 손맛이 결여된,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았던 부모님의 충만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어딘가 부족한 음식들을 먹으며 우린 평생 채워지지 않는 그 빈자리를 쓸쓸하고 애틋하게 어루만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애도는 잊으려는 노력보다는 간직하는 노력일 것이다.
육아의 최종 목표는 아이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온전한 두 발로 서게 하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를 이해하는 궁극도 비슷하다. ‘누군가의 부모’에서 벗어나 그들을 개별적 존재로, 그저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각자의 꿈과 열정과 웃음과 눈물을, 실수와 후회를 지닌 개인 자체로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한국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외로움을 숨긴 건 사랑하는 사람을 배려해 10%씩 남겨두던 엄마 방식의 사랑이었다는 걸, 그런 숨겨진 엄마의 인간적인 모습마저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애도는 성숙한 방식의 사랑을 배우기 위한 의미 있는 과정이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은 모두의 통과의례다. 남겨진 자들의 몫은 무엇인가. 그저 그들이 남긴 유일한 유산, 나의 세상을 지켜나가면 된다. 엄마가 치열하게 사랑하고 보살폈던 나의 세계가 더욱 큰 사랑과 이해로 가득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엄마의 땅에서 엄마를 생각하며 쓴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는 지금의 미셸처럼, 그렇게 종종 엄마를 떠올리며.
https://www.youtube.com/watch?v=JGdn9s-8O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