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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joo Mar 30. 2023

영국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배운 삶의 귀여움 - (1)

영국의 한 노부부 에어비엔비에서

문득 생각해 봤다. 영국 교환을 와서도 온전히 혼자 시간을 보낸 하루가 거의 없었다. 여행을 할 때에도, 수업이 없어 집에서 쉬는 날에도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 있거나, 바쁘게 마무리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한국에서도 자유롭게 혼자 하루를 ‘잘' 살아낸 적이 없는 것 같다. 핸드폰을 놓지 못하거나, 불안함을 놓지 못하거나. 마음의 초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차라리 밖에 나가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침대에 처박혀있는 게 일상이었다. 삶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그 오랜 숙제를 다름 아닌 타국의 노부부 댁에서 홀로 보낸 시간을 통해 배웠다.



레스터 교환학생 생활을 마무리하고 3주간의 마지막 유럽 여행을 위해 떠나는 날이었다. 처음 가져본 나만의 공간, 언어가 달라도 마음이 잘 맞던 친구들. 다시는 없을 시간들을 두고.


런던, 파리, 스위스로의 여행을 앞두고 이렇게까지 몸과 마음이 무겁다니. 나는 과연 여행을 행복하게 즐길 수 있을까. 여러 두려움이 밀려오던 찰나에 런던행 코치 버스에서 내렸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되었다는 견디지 못할 외로움에 잠식되려던 순간 한 번도 뵌 적 없는 백인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곤 말을 걸어왔다.


 

"Judy! Nice to meet you. I'm Susan"



한국에서 찾아오는 남자친구와 3주 여행을 시작하기 전 이틀간 런던에서 혼자 머물 숙소를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시드컵(Sidcup)'이라는 낯선 지명이 운명처럼 들려왔다. 런던 시내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듣도 보도 못한 그곳의 에어비엔비에서 일주일 간 머물었던 친구가 너무 행복한 경험이었다며 그곳을 추천해 준 것이다. 영국을 떠나기 전 이곳에 한 번이라도 머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끌림은 이상한 확신이 되었고, 어느새 나는 수잔 할머니를 좇아 25kg의 묵직한 캐리어를 들고 시드컵으로 향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많이 슬프냐는 할머니의 다정한 물음은 하루아침에 영국의 구성원에서 방문자가 되어버린 내 외로움을 보듬었다. 느릿느릿한 할머니의 말투로 미루어보아 할머니의 걸음도 그러하겠지. 하지만 할머니는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장서 런던의 기차역을 전전하셨다. 한참을 걷다가 슬쩍 뒤돌아보며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할머니의 이상한 배려에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걸어가는 동안은 한마디도 없었지만 기차와 버스에서는 제법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가면 훗날 한국에서 직업을 구할 때 도움이 많이 되니?"

"그다지 그렇지도 않아요.. "

"말도 안 돼! 외국에서 살아가는 경험이 얼마나 큰 지혜인데. 한국 회사들은 멍청이네."


"넌 돌아가면 어떤 일을 하고 싶어? “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글을 통해서 제 이야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는 직업을 갖고 싶어요."

"잘 어울리네. 여기 온 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나중에 돌아가면 이곳의 이야기를 꼭 글로 써주렴."



Rosewood 골목. 확실히 런던 시내와는 동떨어진 곳이다. 시드컵역에 내려서도 캐리어가 쉬이 끌리지 않는 투박한 거리를 한참 걸어야 집이 나온다. 할머니는 직접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시범만 보이고는 뒤로 쏙 빠지셨다. 쑥스러운 내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조금 후에 조그만 몸집의 할아버지가 걸어 나오셨다. "Nice to meet you, Judy! And welcome to our house. Come in."


영화 <업>의 할아버지가 튀어나온 줄 알았다. 정갈하게 정리된 하얀 백발에, 붉은 넥타이와 니트를 반듯하게 입고 계신 할아버지는 점잖은 지배인처럼 뒷짐을 진 채 방의 곳곳을 보여주셨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따뜻한 톤의 거실과 거실 한 중간의 식탁 옆으로는 위층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이 있다. 할아버지의 위태로운 걸음을 따라 삐걱삐걱 계단을 올라가니 'Judy'라는 이름표가 붙여진 방이 있었다. 일단 방 구경은 차차 하기로 하고 바로 저녁 시간을 가졌다.


이 숙소에 대해 가장 기대한 건 수잔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식사였다. 두 분의 아들 Sam 아저씨가 권해주신 화이트 와인과 라자냐로 식탁이 금세 채워졌다. 동그란 식탁 가운데에 아무렇게나 놓인 감자더미를 보니 역시 영국 가정집의 식사가 분명했다. 감자는 그냥 평범한 감자가 아닌 재킷(jacket) 포테이토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손수 껍질을 다 씻었으니 재킷까지 같이 꼭 먹으라고 하셨다.


의외로 식사 중에는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처음엔 먼 아시아에서 온 대학생 소녀의 다사다난한 이야기라도 잔뜩 늘어놓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나는 늘 대화를 주도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고도 이 저녁 식사는 아무 문제 없이 편안하게 흘러간다는 걸 곧 깨달았다. 쨍그랑 거리는 식기 소리와 할아버지의 기침. 간간히 주고받는 간략한 대화. 그간 넷플릭스 음성에 자리를 뺏겨온 각종 소리들이 뒤섞이며 식사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때 잠시 사라졌던 샘 아저씨가 서둘러 들어오셨고, 수잔 할머니도 잊고 있던 무언가가 생각난 듯 바삐 움직였다. 잠자코 앉아있던 링턴 할아버지가 설명해 주셨다. "수잔이 몸무게를 줄이러 근처 운동센터에 가야 하는 시간이거든." 겉옷을 챙겨 입고 현관으로 발걸음을 서두르던 수잔 할머니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오더니 링턴 할아버지의 입에 짧은 굿바이 키스를 남겼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링턴 할아버지는 "오!" 하는 짧은 감탄으로 화답했다.



할아버지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또다시 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해야겠다는 부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 타임이 될 무렵에 할아버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왕이 되셨다. 어디선가 낡고 두꺼운 세계지도 책을 꺼내오더니 내가 사는 한국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내셨다. 그리고 나의 남은 여행 일정에 대해서도 잠자코 듣더니, 조그만 tandem 자전거 모형을 슬쩍 집어 보이신다.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떠오른 듯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tandem -2인용 네 발 자전거


"젊었을 때 수잔과 나는 이 tandem을 타고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곤 했어. “


현재의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유로스타 건설 기금을 기부할 만큼 오래된 이들의 역사가 찬란한 고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벌떡 일어나시며 물었다. "우린 늘 이 시간에 BBC 뉴스를 보는데, 원한다면 같이 보겠니?"

달리 할 것도 없었는데. "그럼요!"


할아버지가 타 준 a cup of tea와 함께 뉴스 시청이 시작됐다. 집에서도 잘 챙겨보지 않는 뉴스를, 처음 뵌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서, 그것도 영어로 듣고 있는 낯선 경험이 전혀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종종 할아버지는 녹화된 영상을 멈추고는 한 마디씩 코멘트를 덧붙이셨다. 40분 남짓의 뉴스 시청이 끝나자 할아버지는 쿨하게 나를 방으로 보내셨다. bye bye 하는 귀여운 인사말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 누웠을 때는 겨우 저녁 9시다.


내 방은 에어비엔비 어플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침대 위에 놓인 귀여운 강아지 인형과 웰컴 페레로로쉐. 하얀 코끼리 시트와 파란색의 이불. 방은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사랑스러웠다. 오직 에어비엔비만을 위해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꾸민 방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전체적인 통일감 없이 알록달록한 꾸밈새에 방안 곳곳 놓인 인형과 책들, 소품들은 오랫동안 시간을 두어 쌓인 할아버지 할머니의 취향을 보여주는 듯했다. 방 한편의 책상 위에는 시리얼 바들로 채워진 통이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만약 우리와 아침을 먹고 싶지 않다면, 이 시리얼 바를 마음껏 가져가세요." 다정함이 흘러넘치는 방이다.

 

겨우 2박 3일간 머물게 될 이 집. 더구나 힘든 이별을 막 마치고 친구들과 떨어져 오게 된 낯선 이 장소에서 나는 단 몇 시간 만에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섬세한 마음과 과하지 않은 느린 속도의 대화, 연륜과 취향이 느껴지는 따뜻한 이 집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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