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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Jul 26. 2024

으음~ 아니야, 이건

   국민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성의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다. 선생님은 우리 학교가 첫 발령이었다. 당시는 자가용이 없던 시대라, 출퇴근이 어려워서 선생님들은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다.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의 선생님 댁에 놀러 가기를 즐겼다. 자주 찾아갔는데도 그저 우리를 귀여워해 주시는 선생님 덕택에 우리는 선생님과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학교가 좋아졌다.


  선생님은 아침마다 문제지 한 장씩을 풀도록 했다.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나도 문제지를 열심히 풀기 시작했다. 때마침 내 친구 옥희가 전교에서 1등을 하던 때라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같이 숙제도 하고 공부도 하기 시작하던 터였다. 날마다 문제지를 풀게 되면서부터 내 성적은 눈에 띄게 쑥쑥 올라갔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공개적으로 칭찬해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속으로는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어서 집에서도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리 시절엔 누구나 삶에 큰 영향을 주신 선생님 한 분이 있었을 것이다. 내겐 성의 선생님이 그런 분이다.) 친구들을 불러 같이 놀면서도 흰 띠를 머리에 두르고 공부했다고 한다. 내 기억엔 없지만, 머리띠엔 ‘하면된다’고 쓰여있었다 하니, 어린 내가 단단히 마음에 새겨넣었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중간고사 시험이었을 것 같다. 평소에는 친구와 바꿔서 채점했었는데, 그날은 시험을 보자마자 바로 시험지를 걷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은 채점한 문제지를 나눠주면서 점수가 잘못된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보니 틀린 문제가 1개였다. 그 답안이 ‘다’ 였다. 그런데 ‘다’를 지우고 ‘나’로 고친 자국이 보였다. ‘아, 맞을 수 있었는데!’ 나는 너무 아쉬웠다. 교실은 웅성거리고 있었고 몇몇 친구들은 앞으로 나섰다. 아, 100점 맞고 싶다. 어찌할까?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호’하고 쉬었다. 지웠던 선 하나를 은근슬쩍 다시 그어 ‘다’로 고쳤다. 나는 비비적거리며 앞으로 나가서 말없이 선생님께 문제지를 내밀었다.      


  “으응 정아, 이건 아니야, 그냥 들어가아”     


  선생님은 나만 들을 수 있게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엉거주춤 섰다가 그제야 선생님이 내 시험지를 기억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그나마 선생님 목소리가 작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덜덜 떨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정말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쟤는 늘 착한 척 굴더니 본색이 드러났구나. 하고 선생님이 나를 생각하실 것 같았다. 아, 선생님은 나를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기실까?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이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을 텐데! (당시 도깨비 감투나 망토를 입고 투명해지는 이야기가 유행이었다.) 

  들키고 나서야, 비로소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친구들은 자기 성적을 맞춰보느라 아무도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만일 선생님이 큰 소리로 나를 꾸짖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나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지난 뒤에도 선생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그전과 똑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장면이 떠오르면 감동이 차오른다.) 어느 저녁때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도 그에 대한 말이 없었다. 찐 고구마를 내미는 어머니께 웃으며 반공 웅변대회 원고를 내밀고는 돌아갔을 뿐이다. 선생님의 관대함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시험지 사건은 오랫동안 내 맘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내가 교사가 되었다. 교사 초반 시절인 1990년까지만 해도 성적에 대해 그리 심하게 민감하지 않았었다. 학생들도 교사들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다 수능 체제가 들어선 2000년 후반이 되면서부터 시험 성적은 학교생활의 전부인 듯, 목숨을 거는 상황으로 바뀌어 갔다.


  내가 1년 동안 학교 대신 미국에서 연구 생활하고 돌아온, 2012년 어느 즈음이었다. 나는 1년 동안 쉬면서 수업 연구만 했기에, 다른 사람들이 꺼렸던 교무부 차석을 기꺼이 떠맡았다. 교무부 차석은 담임 교사와 달리, 수당도 없고 고과 점수도 없었지만, 교무 업무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고 기록하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교무에 관한 각종 문서를 처리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때가 중간고사였는지, 기말고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험이 다 끝나서, 종례할 때였는지, 교무부에는 나와 교무부장과 몇몇 선생님들만이 남아 있었다. 한 학생이 교무부장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수학시험 보는 동안에 핸드폰이 제 가방 안에 있었어요.”     


  그 학생은 공손한 자세로 핸드폰을 내보였다. 내가 모르는 학생이었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표정이 딱 보기에도, 착하고 순수하다고 느껴졌다.     


  “어?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었다면, 0점이야. 일단 가봐. 나중에 알려줄게”     


  그 학생의 수학 담당이었던 교무부장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나는 뒷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몰랐으면 그냥 점수 받을 수 있는데, 아이가 정직하다는 대가로 0점이라니!


  그전에도 이미 시험 시간에 핸드폰이 울리면 부정으로 인식되어 학교에서는 0점 처리되도록 하는 게 몇 번이나 진행되었던 때였다. 그 때문인지 그 사건은 싱겁게 끝이 났다. 그 학생을 0점 처리하도록 하는 업무 지시가 내게 내려왔다. 나는 일 처리를 하면서도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아무도 들은 이가 없는데, 본인의 소명만으로 기계적으로 0점 처리를 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직을 칭찬해주지는 못할망정, 정직할수록 손해 봐야만 한다는 그 사실이 아프게 다가섰다. 얼음보다 차갑고 예리한 이 교육 현장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라고 교육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지금도 그 학생을 생각하면 목이 움츠러든다. 나의 부정직을 부드럽게 질책했던 선생님과 달리 정직의 대가를 차갑게 돌리는 이 시대에 대해서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단호함의 끝은 어디일까? 더이상 정직을 살아남지 못하게 하는 것이 교육 현장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으음~ 아니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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