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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Aug 11. 2024

여로와 텔레비전의 추억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4년쯤 제주에 전기가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저녁이면 호야에 불을 켰다. 호야란 석유를 담은 램프에 유리 갓을 씌워 심지에다 불을 붙이는 도구이다. 저녁이면 큰방에 모두 모여 호야를 켜고 함께 떠들다가 잠을 잤다. 그런데 아침이면 호야의 유리 갓이 거멓게 그을려서 매일 나는 호야를 닦아야만 했다. 호야의 입구는 좁은데 가운데가 넓고 둥글기에 그 안까지 닦으려면 조심히 손을 집어넣어야 했으니, 여러모로 불편했다. 어쩌다 깨지기라도 하면 손을 베기도 했다. 


  그러다 전기 덕분에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반짝이는 백열등이 생겼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게다가 전기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이라는 게 나타났다. 우리 동네 제일 부자인 큰아버지가 TV를 들여놓은 것이다. 그런 소문은 어떻게나 빨리 나는지, 사람들은 저녁이면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 큰아버지 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는 여로였다. 여로가 시작되는 날이면 큰아버지는 집 마당에 텔레비전을 놓았다. 큰아버지네 마당은 300평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때는 여름이라, 흙으로 덮인 마당에는 미지근한 공기가 나풀나풀 흔들리고 작은 백열등이 현관 앞에 달랑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부터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멍석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드디어 여로가 시작될 즈음이면 커다란 멍석 2개에 가득,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그으 옛날 오색댕기, 바람에 나붓길 때~’ 라는 주제가가 나올 때쯤이면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입을 싹 닫고 귀를 쫑긋 세우고서는 흑백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로는 한복을 입고 비녀를 꼽은 분이가 나온다. 분이는 약간 모자란 영구라는 남편을 일편단심으로 섬기는 여자다. 영구의 라이벌로는 일본 순사 앞잡이인 달중이가 있다. 영구는 분이를 사랑하고 분이는 남편인 영구를 따르지만, 그걸 방해하고 차지하려는 달중이의 끈질긴 시도가 주 스토리이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은 화면은 영구가 ‘색찌야’하고 부르는 장면이다. 매회 마다 나온 것 같은데 한 번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달중이가 어떻게든 분이를 영구에게서 빼앗아 보려고 영구를 고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붉은 피가 영구의 얼굴에 흘렀다. 나는 그 장면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얼른 집으로 도망쳤다. 붉은 피가 나를 쫓아 오기나 할 것처럼 가슴이 터질 듯 뛰어 내달리던 기억이 난다.    

 

  나는 우리 집에도 TV가 있었으면 했다. 많은 사람이 우리 집에 모여들면, 얼마나 신이 날까? 큰아버지네 정화처럼 나도 주목을 받을 수 있을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나보다. 

  그해 겨울이 올 무렵 드디어 우리 집에도 텔레비전이 생겼다. 일본에서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신났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그리 많은 사람이 모여들지 않았다. 으쓱하려던 내 마음은 초라하게 시들었다. 


  추워갈 때라, 마당 대신 안방에 몇몇 아주머니들이 몰려와 자리를 지켰다. 그래도 그렇게 함께 모여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재밌는 일이었다. 여로가 끝나고 9시 늬우스도 끝나고 한밤중 돼서야 아주머니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내가 텔레비전에 빠져들었다. 아침에도 학교에 가기 싫었다. 아침이면 어머니가 먼저 일을 나가셨다. 나는 집에 눌러앉아 아침 프로를 보았다. 나를 제지할 사람은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다 오전 9시가 가까워서야 부리나케 학교로 뛰어갔다. 어떨 때는 가방 챙기기가 싫어서 결석했다. 브라운관에 검은 반점이 무수히 찍힐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렇게 끝나고 나면, 마당에 피어있는 꽃 냄새를 맡거나 꽃잎을 따서 흙에다 꽂으며 혼자서 소꿉장난을 했다. 진분홍색 분꽃에 열매가 열리면 깍지가 달린 채로 분꽃을 땄다. 그걸 늘어뜨려 귀걸이를 하고서는 거울을 보며 드라마 흉내를 내기도 했다. 나 혼자, 내가 꿈꾸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어떻게 학교에 꾸준히 나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공부 잘하는 친구와 단짝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오래도록 학교와는 담쌓고 살았을지 모른다. 여로의 분이처럼 현모양처(賢母良妻)만을 꿈꾸며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학교에 안 갔던 그 시절이 그저 낭비였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때 내가 느꼈던 꽃, 나무, 흙, 바람, 햇볕 그리고 너른 마당과 함께 덩그마니 서 있던 우리 집은 내 피부밑 어디엔가 숨어서 숨을 쉬고 있다. 자유라는 느낌으로!

 그때 나는 정서적으로 풍요로웠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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