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부모님은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며 내가 언니랑 싸우거나, 남동생과 싸우는 것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 내가 억울한 상황엔 그 별 대수롭지 않음이 서운해 쪼르르 달려가 공정하게 심판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럼 사랑의 매를 짠하고 들고 나타나 잘한 놈 하나 없는 똑같은 벌을 주셨다. 그때 솔로몬이 없었더라면 말다툼이 몸 다툼이 되지 않았을까?
부부싸움은 솔로몬도 없고 브레이크도 없다. 남이 알게 싸우는 건 위반이었고, 우리 안에서 최대한 티 나게 싸워야 했다. 싸우더라도 배가 고프면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었고,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출근도 해야 한다. 그게 싸움의 규칙이었다.
싸움은 우리의 영역 안에서만
부부 싸움은 솔로몬도 없고 브레이크도 없었다. 이걸 친정 솔로몬한테 말하자니, 걱정만 끼칠게 뻔했다. 미묘한 감정이지만, 친정식구들에게 남편이 밉보여서 나쁜 놈으로 찍히는 건 더 싫었다. 결혼하고 내 감정대로만 한다면 싸우는 것보다 수습하는데 더 힘을 뺄 것 같았다. 어쩌다보니 딱 둘이서만 힘 빼는 싸움을 했다.
싸움의 이유도 우리 안에서만
싸움의 원인은 대부분 결혼 후 의도치 않게 엮여야만 하는 어려운 관계와 배우자 때문이었다. 그 중에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우리 부부 밖의 일이었다.니네 집, 우리 집 운운하며 자존심 대결로 시작해 결국은 ‘너랑 못살겠다’로 끝났다. 문제는 뒤끝이었다. 감정만 상한 게 아니라 빈정이 상했다. 볼 때마다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나 정말 못 살 것 같았다. 정말 한때는. 그런데 살아보니 더 힘든 건 배우자였다. 배우자의 주변 환경이나 그의 가족이 주는 불편함은 따지고 보면 딴 세상일이고, 사소한 먼지에 불과했다. 그때마다 잠깐 참으면 되지만, 남편은 오늘 또 보고 내일 또 봐야 하니까. 싸울 이유는 허다하지만 지금 내 앞에 마주 앉아있는 이 남자가 지금 이순간 제일 시급했다. 맛집도 메인 요리가 가장 중요하니까.
싸울 때 착한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우리가 퍼즐 조각처럼 딱 맞아 끼워 떨어질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인지 신혼의 첫 페이지부터 갈등의 소재가 될만한 것은 다 펼쳐내어 악착같이 시시비비를 가려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될 일들이 쌓여갔고, 퇴근하면 기다렸다는 듯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 과격한 토론을 했다. 많이 싸울 거라 예상했고, 역시 치열하게 싸웠다. 많이 져 주고, 받아줄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였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착한 남자라 믿었는데 바락바락 이기겠다고 덤벼들 때마 배신감이 치솟았다. 논리력이 부족한 탓에 내 입에서 말이 안 되는 말만 나와 더 쫄렸다. 하는 수 없이 비겁하지만 다른 무기를 꺼내들 수밖에 없어, 태어나서 해본 적도 없는 나쁜 말들을 내뱉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착한 남자가 아니라, 나보다 잘난 남자였으니까. 내 말이 틀리다는 걸 꼭 짚어주고 싶었는지 본인이 아는 손톱의 때만 한 지식까지도 꺼내서 증명해 냈다. 나는 더 못되게 남편 가슴을 후벼 팠고, 나도 몇차례 고통스러웠다.
서로의 자리를 오래 비워두지 않는 것
우리의 싸움이 칼로 물 베기는 아니었다. 뭐라도 남는 게 있는 싸움이었다. 1) 상대가 극도로 싫어하는 걸 알았으니 그것만은 자제하기도 하다가 일부러 악용하다가를 반복했다. 긍정적이기만 하고, 달콤한 대화를 통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아주 유의미한 결과물이다. 상대의 아킬레스건과 분노의 포인트를 아는 것도 배우자를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2) 남편이 괴물이 되고, 아내가 미치광이가 되는 모습을 두 번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금니를 꾹 깨물며 참는 법을 배웠다. 나는 여보 덕분에 없던 인내심이 생겼다고 하자, 내 남편 말로는 본인은 신혼 때 이미 자기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했다. 정확히 수치화하기는 힘들지만 우리는 각자 좀 더 인내하는 법을 익혀 가는 중이다. 3) 가장 의미 있는 성과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는 것이다. 알아서 돌아오기도 했지만 서로가 빨리 돌아오게 하는 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가끔 일부러 더디게 돌아오고 싶을 때, 내 화를 풀어주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확인하면 더 가속도가 붙기도 했다. 지금은 필요와 의무에 의해 각자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이것 역시, 잦은 싸움이 일궈낸 부부 회복탄력성이다.
싸우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밥 맛
남 부러울 것 없는 부부였다가, 적이 었다를 수백 번 반복했다.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당장 법원에 가서 이혼도장을 찍을 기세로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어느새 배고프다며 내 옆에 자연스럽게 앉아 알리오 올리오를 뺏어먹는 게 내 남편이었고, 갑자기 양념 치킨이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게 나였다. 그럼 꼭 남편은 나에게 물어보았다.
남편 : X촌 먹을래? (내가 좋아하는 치킨 브랜드)
나 : 응. 레 X 콤보 시켜줘
남편 : 여보세요? 여기 은평뉴OO 10XX동인데요. 레 X드 콤보랑 무 2개 포장해주세요. (배달비 아끼는 스타일)
나 : 언제 된대? 맥주는?
남편 : (후다닥 지갑 챙기며) 클XX드?? 칭 X오?
치킨이 오면, 약속한 듯이 맛있게 먹는데만 집중했다. 따뜻할 때 가장 맛있는 치킨인데 혹여나 밥 맛이 떨어질만한 좀전의 대화와 관련된 말은 금기어였다. 나는 날개, 남편은 다리 부위를 좋아한다. 그래서 콤보를 시켰다. 남편이 먹는 다리도, 내가 먹는 날개도 이순간만큼은 둘다 진리다. 맥주 한 캔 다 비우고 났더니 노곤노곤 해진다. 오늘일이 다 잊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 잊은 듯 물어봤다.
“내일 오징어 뭇국이나 끓일까?”
나이 먹고 하는 싸움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심판이 되어 달라고 말하기엔 내 답답함보단 사회적 시선이 더 낯뜨거웠고, 어른이라고 불리는 값에는 싸움은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자립심의 비용이 포함되었으니까. 진흙탕 싸움 정도는 되어야 법원에 있는 솔로몬들에게 냉철한 심판을 받을 수 있다. 아직까지 그 심판이 절실히 필요할 만큼의 말싸움과 몸싸움은 없었다. 그걸로 오늘도 위안을 삼는다.
‘이 정도면 잘 싸우고 잘 먹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