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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Feb 16. 2021

다정한 배우자로 살게 해 주세요

어느 집 둘째 딸의 간절한 기도

내 기억 속엔  살면서 가장 많은 걱정을 했던 한 부부가 있다. 한평생을 함께 살면서 좋고 싫음의 표현대신 늘 말을 아꼈고 오직 자식 키우는데만 전념하셨던 내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나에게 최고의 부모이지만, 서로에게 최선의 배우자는 아니었다. 어린 나의 눈에 비친 모습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부모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이유로 배우자보다는 ‘부모’라는 이름으로만 사신 엄마아빠. 두 분의 행복한 미소를 보는 건 언제나 우리 삼 남매와 관련된 일이었다. 언니가 좋은 성적을 받으면 의기양양하셨고, 밖에서 누군가 우리 남매 칭찬을 하면 그때 두 분은 ‘우리 애들이 잘 커줘서 고맙다’며 짧은 대화를 나누셨다. 내 어릴 적 친구의 부모님들은 대게 아주 다정하진 않지만 그리어 둡지도 않으셨다. 친구들은 엄마, 아빠와 같이 동행하는 모습이 편해 보이고 자연스러웠다면, 나조차도 엄마랑 따로, 아빠랑 따로인 게 마음이 더 편했다.


삼 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나는 유독 어색한 사이의 부모님이 고민거리였다. 두 분이서 떨어져 다니면 나라도 아빠를 챙겨야 할 것 같은 책임감에 사로잡혀 외출을 하더라도 일부러 아빠손을 꼭 잡고, 말도 붙였다. 그 노력을 아빠가 아는 듯했다. 그래서 더 쫑알대는 딸이자 가장 애교가 넘치는 둘째 딸로 기억하고 계실 거다. 우리 집은 첫째만 더 이쁨을 받고, 막내라서 더 챙김을 받는 집은 아니었고, 덕분에 나는 시대적으로 우울한 둘째는 아니었다. 둘째 딸에겐 두 분의 관계가 항상 마음의 짐이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는 부부싸움을 하시고 두 분이 늘 하시는 말이 정말 듣기가 싫었다. ‘너희 때문에 산다’  두 분의 진심인 걸 잘 알아서일까? 내가 걱정이 많았던 걸까? 나는 유독 부모님이 싸우신 날에는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덕분에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기도라는 걸 드렸다 ‘두 분이 빨리 화해하게 해 주세요. 두 분이 행복하게 해 주세요’는 내 기도 중 늘 빠지지 않은 대사였다. 그렇게 매일같이 기도를 하다 보면 어느 날 기적처럼 두 분이 다정해 지실 줄 알았다. 중학생이 될때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간 수련회에서도, 친척집에서도 그 기도만큼은 놓치지 않고 매일 열과 성을 다했다.


우리 부모님의 사이는 기도로 해결할 수 없는 관계임을 중학생이 되서야 깨달았다. 두분의 싸움의 횟수와 강도가 이를 뒤받침 했고, 내가 두 분이 하는 말을 듣고 무심코 지나치기에는 너무 많이 커버린 탓이었다. 부모님 역시 우리 삼 남매가 성장하는 걸 위로 삼아 하루하루 버티시는 듯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 두 분이 늘 일을 하셔야 했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아닌 이유로 두 분만 마주하기에는 참 힘들었을 것이다. 두 분의 한숨 소리와 어두운 표정과 거친 말투는 세상에 안 되는 것도 있는 진짜 현실의 벽을 실감케 했다. 두 분이 개선되는 것은 체념했지만, 다른 걱정이 생겼다. '우리가 잘 크는 것만 바라신다고 하셨는데, 그럼 우리가 다 크면 두 분은 헤어지시는 걸까?' 나는 엄마도 아빠도 둘 다 좋은데, 그래서 같이 살고 싶은 이기적인 욕심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따로 기숙사 생활을 하자 아빠는 나에게 자주 전화를 거셨다. 엄마와 첫째 딸에겐 아니지만, 나에게만큼은 아주 다정하고 인자한 아빠였다. 매월 자취방 월세와 용돈을 함께 입금해 주셨는데 한 번은 더 큰 금액이 입금된 적이 있었다. 아빠는 ATM기기의 숫자 6을 9로 착각했다면서 그냥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하셨고, 엄마에겐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 이후로도 종종 6자를 9자로 잘못 누르시곤 하셨다. 실수가 아닌 둘째 딸에 대한 편애였다. 그 당시에도 여전히 두 분의 사이는 걱정되기도 했지만, 졸업이 다가올수록 내 앞가림에 대한 걱정이 커지기 시작하며 부모님은 뒷전이 됐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 아빠는 지병으로 하늘나라로 먼저 가셨다. 타지 생활을 했던 나는 급히 아빠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했고 가족들은 먼저 아빠를 보낸 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왜 평소에 더 따뜻하게 아빠를 보듬지 못했냐고 울먹이며 소리를 쳤다. 그게 엄마 탓은 아니었는데 그동안 둘째 딸로 살며 가슴 졸이며 걱정했던 모든 걸 모질게 쏟아부었다. 그리고 결심을 했다. 내가 결혼을 한다면 엄마, 아빠처럼 자식만을 위해 살지 않기로. 평범한 가족이었지만 실상은 평범하지 않았고, 괜찮아 보였지만 아픈 가족이었다. 특히, 둘째 딸의 기억에는. 왜 하필 나는 다정한 부모님을 간절히 원하고 집착했을까? 그 바람조차 입 밖으로 꺼내면 부모님에게 죄책감이 될까 봐 드러낼 수 없었다.


두 분도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으셨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던 해에 아빠 사업이 부도가 났다. 이후 아빠는 거의 매일 술을 드셨고 엄마도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말로는 우리 앞에서 싸우는 게 싫어서 아빠와 대화하는 걸 피했다고 한다. 엄마는 엄마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버티는 방법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모습이 아빠에게는 본인을 무시한다는 기억으로 자리 잡으신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더 고립된 생활을 하셨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오해일 수도 있고, 두 분이 감당하기엔 힘든 현실이었을 수도 있다. 그 와중에 우리 삼 남매는 각자 밥벌이를 할 만큼 잘 컸고 좋은 배우자도 만나 결혼을 했다. 이것만으로도 부모님은 이미 할 일을 다 한셈이다. 두 분에 대한 마지막 욕심이 있다면, 두 분의 기억에 우리 말고 배우자로서의 좋은 기억이 단 몇 장면이라도 남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세상에 안 힘든 게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하신다. 엄마 인생은 참아내야 할 것 천지였으니 웬만한 힘든 일은 공감해 주시기보단 호통을 치신다. 아마 엄마의 결혼생활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도 엄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조금 덜 힘들어지는 방법을 찾다 보면 참고 버티는 것보다 더 괜찮은 방법도 있다고. 나는 힘든 일이 있으면 함께 머리 맞대고 기댈 배우자가 있는데, 엄마도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엄마는 우리 엄마로 지낸 시간 말고는 힘든 기억뿐 일 텐데, 이제 남은 인생은 본인 자신을 위해 행복해지시길 기도드린다.


덕분에 나는 이왕이면 좋은 배우자가 되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아이를 낳고 남편과 싸울 때마다 어릴 적 둘째 딸의 전전긍긍하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본능적으로 화해를 시도하고 빨리 화를 풀려고 한다. 나는 적어도 엄마처럼 자식 때문에 배우자랑 사는 사람은 아니다. 좋은 남편을 만난 게 감사하고, 그와 사는 게 재밌다. 앞으로 행복하게 살 것이다. 좋은 부모이기 전에 좋은 배우자가 될 것이다. 나와 내 남편이 행복하게 사는 것 또한 내 아이에게 가장 큰 선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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