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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Dec 21. 2022

습관적으로 '이해가 안돼'라고 말하고 있다면

대화만 해도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버지와 충돌이 잦은 아들이었다. 지금도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의견이 합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이전만큼 충돌로 이어지진 않는다. 어느 정도 선에서 의견이 합의를 이룬다.

부끄럽지만 20대 중반까지도 아버지의 많은 부분을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가치관, 가르침, 가끔은 맛있는 걸 먹어보라며 코앞까지 들이미시던 젓가락까지.


아버지는 보수적인 분이셨다. 엄한 할아버지 밑에서 장남으로 자라셨고, 한때 육군 장교로 근무하기도 하셨다.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3명의 아들을 키우시면서 IMF도 이겨내시고, 뉴스에도 나올만큼 불안정했던 직장에서의 시간도 이겨내셨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 나름의 선택을 하셨고, 결국 가족을 지켜내는 데 성공하신 분이셨다.

반면 나는 삼형제 중 가장 밖으로 나돈다는 둘째였다. 실제로 형, 동생과 달리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족의 품을 가장 일찍 벗어났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짧아진만큼 더 넓고 다양한 세상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 청소년기는 가족의 품을 벗어나 나에게 맞고 편한 사고방식들을 내 나름대로 구축했던 시기였다.


내가 구축한 세상은 아버지가 살아온 세상과 달랐다. 안정보다는 모험과 경험을 추구했고, 내가 납득하지 못하면 전통도 관습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가 지켜보는 나는 살얼음판 위에 있는 것처럼 불안정하고 많은 것이 결정되지 않은 희뿌연 상태였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들은 안전하지만 재미없고 나를 옭아매는 것들이었다. 아버지 눈엔 내가 하고싶은 것들이 재미야 있겠지만 불확실한 것들이었다. 내 고등학생 시절부터 20대 초중반까지 아버지와 나눈 대화들은, 소위 '이해 못하는 것들' 투성이였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어느 때보다도 싫었다.


어떠한 계기도 없이, 문득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살아온 세상은 지켜야하는 것들이 많았던 시기였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많은 걸 지켜내셨다. 아버지의 방식은 적어도 아버지의 세상에선 검증된 방식이었다. 아들이 성공할지말지 모르는 불확실한 길을 걷느니, 차라리 재미없더라도 검증된 길을 걷길 바라셨을 것이다. 자식이 괜찮길 바라는 것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일테니 말이다.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왜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하셨는지, 왜 내 선택을 탐탁치 않아 하셨는지도. 아버지의 경험 속에선 나의 방식이 검증되지 않은 방식들이었다. 그 길이 안전한지, 확실한지 알지 못하시니 나에게 본인의 방식을 요구하신 것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이해가 됐지만, 여전히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때와 지금은 사람도 세상도 달랐다. 그때 통했던 게 지금도 통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거의 모든 게 불확실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아버지의 방식을 나는 지루해할 거라는 걸. 그래서 아버지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해는 하지만 동의는 못하는, 그런 입장이었다.

아버지의 세상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의 대화가 편해졌다. 아버지의 요구를 회피하기만 했었는데, 내 나름대로의 이유로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대화가 안통할 거라는 나만의 편견을 덜어내고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살던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는 한다고. 다만 그 방식이 나한테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그렇게 아버지도 귀를 열기 시작하셨다. 이젠 아버지와의 대화가 어렵지 않다. 가끔 튀어나오는 옛날 사고방식도 유연하게 받아친다.


그때부터 '이해가 안된다'는 표현과 '이해는 하지만 동의는 못한다'는 표현이 갖는 차이가 정말 크다는 걸 느끼게 됐다. 두 표현의 차이는, 상황을 공유하는 대상의 입장이 되어보았는지에서 나타난다.

'이해가 안된다.' 는 그 대상의 입장은 빠진 채 내 의견만 반영된 표현이고,

'이해는 하지만 동의는 못한다' 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고려를 해보았고, 내 의견까지 내세운 표현이다.

두 표현의 차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전자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빠져있고 후자는 존중이 담겨있다. 이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어렵지 않은 표현인데 왜 많은 경우에 '이해가 안돼.' 라는 표현이 쓰일까?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내 의견만 반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상대방의 입장에서 고민해보지 않는다. 상대방이 고민한만큼은 물론이고, 아예 내 입장에서만 상황을 바라보는 경우가 훨씬 많다. 'Be in someone's shoes' 라는 표현이 있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지 않고서야 그 신발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는 의미를 가진 표현이다. 사람들은 남의 신발을 신어볼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들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적어도 이해는 되는 경우일 것이다.


존중이 빠지고 입장만 남은 표현은 공격적이기 마련이다. 텍스트로 읽어보면 상대방이야 어떻든 내 입장만 드러나있다. '이해가 안돼'라는 표현엔 상대방의 맥락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찾을 수 없다. 그저 탐탁치 않은 내 입장만 느껴진다. 존중을 담으면서도 의견을 전달하는 방법은 충분히 많다. 앞서 말한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그러면 안되지'에도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했다는 게 드러나있다. 물론 시도는 해봤지만 실제로 이해가 안된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땐 '이해해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잘 모르겠어.' 라는 표현도 있다. 존중과 의견이 함께 담긴 표현은 충분히 많다.


'이해는 하지만, 동의는 못해요.'

네이버 블로그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내 가치관을 관통하는 문장이 되었다.

'이해가 안된다'는 표현이 내포한 작지 않은 공격성을 배제하는 동시에 본인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이 표현은,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나는 그것을 지지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동시에 본인의 주관을 지킬 수 있다.


여전히 누군가는 이 문장을 보고도 난 이해가 안된다 라고 말할 수 있지만, 괜찮다. 내가 이 의견을 고민한 깊이만큼 아직 고민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 소중한 누군가와 의견이 충돌하는 일이 생겨 다투게 되면, 꼭 이 말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이해는 하지만 동의는 못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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