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암스테르담 - 이동할 땐 우여곡절을 겪기 마련.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거짓말처럼 날씨가 좋았다. 첫 날 먹었던 브런치 집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기로 했다. 첫 날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먹으면서 눈여겨봤던 미트파이 메뉴를 고민도 않고 질렀다. 미트파이와 샐러드가 덩그러니 올라간 단순한 접시였는데, 그레이비소스와 페스트리가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던지라 기분이 좋았다. 동시에 '오, 요새 한국에 있는 미트파이들이 수준이 꽤 올라갔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성수에서 먹었던 미트파이의 맛이 이거랑 비슷했던 거 같은데, 이제 아쉬울 때 성수에 가서 먹어야겠다 싶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에, 며칠 전 봤던 나이키의 신발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숙소 근처의 나이키 매장을 방문하는 것을 마지막 일정으로 삼았다. 숙소에서 짐을 야무지게 싸두고, 가볍게 지갑만 들고 산책할 겸 15분 거리에 있는 나이키 매장으로 향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익숙해질 때도 됐던 풍경들이 괜히 새롭게 예뻐보여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걷다보니 도착한 나이키 매장은 불 켜진 채로 닫혀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픈 시간이 몇 분 남은 터라 아직 열지 않았었다. 한국에서도 안해본 오픈런을 런던에서 하게 됐다. 나 말고도 한 엄마와 딸이 같이 오픈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매장 오픈 시간이 다 되어서 들어가야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여전히 직원들이 본 체도 안하고 안에서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왜...? 왜 안열어줘...? 싶었는데 옆에 있던 엄마와 딸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엄마가 문을 두드리며 직원을 불렀다. 마지못해 나온 직원이 아직 제품 입고가 덜 돼서 지금 열 수 없다며 어쩔 수 없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아,,, 내 30분... 결국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숙소로 되돌아와야했다.
바로 스탠스테드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갔다. 진짜 넉넉히 나와서 다행인 게, 하필 철도 파업이 겹쳐서 내 뒤에 있던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시간의 기차가 캔슬됐었다. 조금만 더 여유를 부렸더라면... 멘탈 박살난 채로 공항을 갈 뻔했다. 런던 스탠스테드 공항은 약간 김포공항 느낌인데,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들이 있긴 하지만 히드로만큼 크지 않고, 저가항공의 비중이 좀 높은 공항이라 여러모로...빡빡한 공항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빡빡함이란 인구밀도를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출국 심사의 수하물 검사가 유독 빡센 곳이랄까.. 나는 짐이 크지않아서 수하물을 따로 신청하지 않았었는데, 장거리 비행에 익숙해진 나는 액체류 규정을 조금 느슨하게 바라보고 말았다. 액체류는 사실 작은 용기에 담아 총 1L를 넘기면 안되고, 비닐백에 모든 액체류 용기를 담아야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비닐백의 크기를 간과하고 말았던 것... 내가 가져간 비닐백은 아주 큰...락앤락 비닐이었는데 스탠스테드 공항의 비닐은 진짜 무슨 손바닥 2개 정도의 크기였다. 이 비닐백에 나는 새로 산 몰튼브라운 세면도구 세트, 해리가 준 향수, 내가 챙겨온 세면도구, 선크림, 면도크림 등등을 모두 다 쑤셔넣어야했다. 그리고 당연히 장렬하게 실패했다. 결국 나는 새로 산 몰튼브라운 세트와 해리가 준 향수, 선크림, 스킨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버려야했다. 수하물 검사를 담당하는 직원이 나를 정말 안쓰러워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국심사를 마치자마자 면세점에 보인 여행용 세면도구들..보자마자 남은 파운드 싹 다 털어버렸다. 그리고 발견한 비행대기장은 흡사 전쟁 피난처에 가까웠다. 진짜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려고 대기하고 있었고, 나는 그 한 켠에 자리해 시간을 때우다가, 출국 전 마지막 햄버거를 먹으러 버거킹에 들렀다. 여행할 때 지역 특색 버거 메뉴를 먹는 습관이 있는 나는 영국 맥날에서 특별히 맛있는 메뉴를 먹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공항 버거킹에서 특별할 건 없지만 진짜 맛있었던 햄버거를 먹었다 스테이그 앙구스 기억해둬야한다.. 혼자 맛있는 버거 골랐다며 뿌듯해하다가 문득 다음 행선지인 네덜란드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네덜란드에 도착하면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숙소를 정해놓고는 아무것도 정하지도 알아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무엇을 봐야하나는 커녕 하다못해 숙소 가는 길은 어떻게 되는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조차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고서, 출국 1시간 전부터 부랴부랴 찾아보기 시작했다. 혼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로 1시간동안 정신없이 대중교통 이용방법을 찾다가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시간은 짧았다. 1시간 반 정도만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에 유럽에서 가장 인력 문제가 심각했던 곳이 런던 히드로와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이었는데, 아니나다를까 히드로 공항처럼 주인을 찾지 못한 짐들이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스키폴에 도착했다고 하자, 해리가 스키폴 공항 신기하지 않냐고 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공항이 기차역이랑 붙어있어서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오면 바로 기차역과 연결되어있다. 공항에서 나오면 바로 서울역인 느낌이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해리가 교환학생을 다녀왔던 곳, 뭔가 막연히 평화로운 나라라는 인식, 돌아오는 비행기가 가장 쌌던 곳이라는 이유로 괜히 이미지가 좋았던 네덜란드를 골랐는데, 인터넷 속도가 그 이미지를 와장창 깨부시려고 했다. 3g로 연결이 되다가, 비상망으로 연결됐다가를 반복하면서 텍스트조차 보내지지 않는 미치고 팔짝 뛰는 속도로 변해버렸다. 가는 길을 잘 모르는, 더치어는 더더욱 모르는 나는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결국 통신망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내 멘탈도 안정을 되찾았다. 암스테르담의 기차는 런던의 기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시설도 깨끗한 신식에 공간도 널찍한 것이 대한민국의 대중교통보다도 더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숙소까지는 정류장에서 도보로 15분 정도를 걸어야했는데, 암스테르담에서 살짝 외곽이어서 그런지 아주 잔잔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런던보다는 시원하면서 조용하기까지 한 암스테르담의 시작이 꽤 만족스러웠다. 6인실이지만 거의 사립학교 기숙사 같은 느낌의 도미토리는 넓기도 넓고 깨끗하기까지 했다. 도착했을 때 이미 7시 반이었던 터라, 리셉션 직원에게 추천받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하이네켄의 나라에서 하이네켄 1잔과 안심스테이크, 감자튀김을 먹었는데, 확실히 저녁이 될수록 시원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쌀쌀하다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안그래도 추운데 나를 뺀 모든 테이블은 일행이 있어서 그런지 더더욱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조용한 숙소 동네를 한 바퀴 쓰윽 돌아보기로 했다. 암스테르담은 도시 곳곳이 운하로 이어져있어서, 운하를 따라서 산책하기 딱 좋은 도시였다. 해리가 추천해준 암스테르담 음악들을 들으면서 산책하는 길엔 노을 지는 풍차도 보고, 백조도 보면서 걷다보니 해가 모두 다 져버렸다.
오늘 일정이 그리 빡빡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네덜란드가 맘에 들어서였을까. 일찍 잠들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해가 진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홍등가가 떠올랐다. 시간도 9시가 넘었겠다, 오래 머물 생각 없이 홍등가를 살짝 둘러보기로 했다. 어두컴컴한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홍등가에 도착했더니 웬걸, 암스테르담의 모든 관광객들이 거기에 다 있는 느낌이었다. 붉은 색의 조명과 넘치는 인파 속에서 묘한 풀냄새가 났다. 이게 바로 대마 냄새인가 싶었다. 생각보다 차가운 느낌의 향이 거리 곳곳에서 풍기는 게 정말 낯설었다. 건물 1층과 2층마다 살짝 쳐진 커튼 뒤에 반라 상태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게 더 신기했다. 사진을 촬영하는 게 불법이었지만 숨어서 사진 찍는 사람들은 당연히 있었고, 시선만으로 대리 욕구 충족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낯선 사람들만 있는 낯선 곳에서 낯선 풍경을 보고 낯선 향을 맡는 그 순간이 잠시 무서웠다. 대처할 방법을 모르는 낯선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홍등가를 벗어났다. 해도 졌는데 더 이상 혼자 깨어있고 싶지 않아서 일찍 잠들기로 했다. 그렇게 암스테르담의 첫 날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