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 - 감자튀김은 원없이 먹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아침은 대체로 맑았다. 같은 풍경 같은 날씨여도 사진을 찍고야 말았던 기록들이 말해준다. 암스테르담에서의 네번째 날은, 인근 국가인 벨기에의 브뤼셀에 다녀오는 일정으로 끝이었다. 초콜릿이라면 또 사족을 못 쓰기도 하고, 이번 여행에서 제대로 된 빈티지 마켓 한 번은 보고 오고 싶었던 터라 브뤼셀을 꼭 집어넣고 싶었다. 딱 이 날 하루만 열리는 대형 빈티지마켓이 있어서 다녀오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알버트하인에서 산 샌드위치로 대충 때우고, 바로 브뤼셀로 가는 기차를 탔다.
출발할 때만 해도 널널했던 기차 안은 조금씩 사람이 들어찼다. 처음에 앉았던 좌석 쪽엔 사람들이 널널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내가 2등석 티켓을 구매하고 1등석에 앉아있던 것이었다. 어쩐지. 사람이 계속 밀려드는 듯이 타는데 내가 있는 쪽만 널널할 리가 없었다. 2시간 그냥 눈 꼭 감고 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양심상 일어나서 2등석으로 향했다. 아까 물밀듯이 들어왔던 사람들은 모두 2등석 칸부터 중간 로비까지 빈틈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구겨지듯이 서있던 나는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로 2시간동안 그 곳에 묶여있어야 했다. 사람들의 초대형 캐리어들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을 좀 가보려던 나는, 사람들이 다 내려야하냐는 물음에 화장실을 가려고 한다했더니 다같이 빵터지는 상황에 굉장히 멋쩍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참았다가 나중에 가겠다고 답해버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벨기에에서 몇 정거장 정차를 하고 나니 사람들도 꾸준히 빠져나가고, 다행히 앉을 곳도 생겨서 화장실도 다녀올 수 있었다.
처음 와본 벨기에의 풍경은... 무서웠다. 날이 흐리기도 했고, 역 앞이 공사중인데다가 약간 마을 장터 같은 게 열려있었는데, 이동형 바이킹 같은 놀이기구들도 와있고 사람들도 표정이 굳어있어서 솔직히 말해서 조금 쫄았다. 그치만 조금 삭막했던 거리를 벗어나니 햇살도 맞춰서 거리를 밝혔고,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도 나타났다. 가는 길에 와플집이 보였다. '아 맞다 벨기에는 와플이었지,' 하는 생각이 바로 들어서 고민도 없이 슈가파우더 뿌린 와플을 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식감이었고, 훨씬 은은하게 달았다. 빵이라는 느낌이 강해서인지 내 입에 너무 잘맞았다. 우리나라에서 먹었던 와플이 이렇게 부드러운 느낌이었다면 훨씬 더 자주 사먹었을텐데, 반죽 차이겠거니 했다. 와플을 음미하면서 걸어가다보니, 탁 트인 광장에 빽빽히 깔린 빈티지 제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찾던 빈티지 마켓이었다. 딱 하루 열리는 시장이다보니 사람도 많았지만 물건은 훨씬 더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식기류 소품부터 그림, 옷, 주얼리 등등 빈티지하면 떠오르는 모든 종류의 물건이 다 있었다. 시장 물건이래봤자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구경하느라 바빴다. 특히 내 눈길을 끄는 물건들이 있으면 머릿속으로 사서 어떻게 한국까지 안전하게 가져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시간을 잡아먹기도 했다. 너무너무 사고 싶었던 맥도날드 빈티지 유리컵 시리즈가 있었는데, 깨질 것 같아서 사지 말까 싶었다가 마음의 결정을 따르고 말았다. (그렇게 가져온 유리컵은 약 1년 뒤 어이없게 깨져버렸다.) 구경도 했겠다 컵도 샀겠다, 기분이 한껏 들뜬 나는 그 옆 골목에서 버스킹하는 분들의 음악을 듣고 기꺼이 5유로를 냈다. 벨기에 대표 캐릭터인 땡땡샵도 구경했는데, 생각보다 살 게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과대평가했다는 걸 깨달았다. 막상 가게에 들어가서 구경하니 그리 갖고싶다는 생각이 안들었다. 그래서 한 2분 정도 돌아보다가 다시 나왔고, 골목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으로 풍경과 분위기를 기록했다. 걷다보니 아까 빈티지마켓이 열린 곳보다 훨씬 더 큰 광장이 나왔고, 그 곳을 쭉 둘러싼 가게들 중에 익숙한 초콜릿 가게들을 발견해 들어갔다. 노이하우스라는 초콜릿 브랜드인데,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유명한 초콜릿 브랜드여서 가족들과 해리한테 줄 기념품 초콜릿을 여기서 샀다. 사면서 직원분이 나눠준 초콜릿 바를 맛봤는데, 내 입에는 세계에서 몇번째로 맛있다는 초콜릿 같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냥...적당히 맛있는 초콜릿 정도였다. 기념품을 맛보는 사람들의 의견은 어떨지 궁금했다.(그러나 결국 듣지 못했다.)
광장 옆에는 맛집들로 보이는 식당들이 즐비했다. 사람들이 유독 줄 서 있는 가게가 보이길래 뭔가 했더니 감자튀김 집이었다. 벨기에 감자튀김도 놓칠 수 없어서 줄을 섰고, 작은 사이즈에 소스 2개 정도를 사들고 나왔다. 네덜란드에서는 소스를 튀김 위에 뿌린 채로 줬다면, 벨기에는 생 감자튀김을 따로 나오는 소스에 찍어먹는 방식이었다. 나는 마요네즈와 안달루스라는 소스를 골랐는데, 안달루스 소스는 토마토 페이스트와 마요네즈, 그리고 후추로 만드는 소스였다. 대표적인 소스라고 해서 살짝 기대했는데 기대가 높았던 건지, 입에 썩 맞지 않았다. 내 입에 제일 맛있던 방식은 아무것도 찍지 않는 것이었다. 감자튀김 자체가 너무 맛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고소한 맛을 먹는 게 좋았다. 감자튀김까지 먹고 나오니, 돌아가는 기차까지 시간이 뭔가 애매하게 남아서, 어딜 둘러보는데 시간을 쓰지 말고 맥주나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에서 파는 체리 맥주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어서, 이 참에 체리맥주 파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야외 테라스에 앉아서 시켰던 체리맥주는 조금 희한하게 생긴 잔에 나왔다. 벨리리움이라는 이름의 체리맥주는 체리 향이 정말 약하게 나는 맥주인데, 생각보다 도수가 높아서 나같은 술찌에게는 조금 위험할 수 있는 술이었다. 가을 날씨라고는 해도 햇빛을 받는 야외 자리였고, 내가 술이 또 약해서 취기가 금방 올라왔다. 분명 어디 가지 않기로 하고 맥주를 먹으려고 했는데, 기분이 좋아져서 다른 곳 한 군데만 더 보기로 하고 엄청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찾아본 주변의 볼 거리는 마땅한 게 없어서, 근처 서점이나 살짝 둘러보고 바로 전철로 향했다. 브뤼셀은 생각보다 볼 게 없다더니, 정말이었다. 차라리 브뤼헤를 가라던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브뤼셀로 가는 길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처음부터 2등석 자리에 잘 앉았고, 도착 예정시간보다도 훨씬 일찍 도착했다. 숙소에 돌아가니 너무 이른 감이 있어서 오늘 저녁에는 라이브 바를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숙소 근처까지는 아니지만 또 못 갈 정도의 거리는 아닌 라이브 바가 있어서 늦은 밤에 슬쩍 다녀왔다. 하이네켄을 시켜서 혼자 구석에 구겨진 채로 다른 사람들이 노는 모습들을 구경했다. 대부분 연인이랑 오고, 아니면 친구들이랑 왔다.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 했다. 라이브하는 밴드도 실력이 괜찮아서, 하이네켄 두어 잔 먹으면 뭔가 신나서 사람들이랑 어울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여전히 술에 취한 사람들은 자기 일행들과 놀기 바빠서 동양에서 온 외톨이를 신경쓸 수가 없었다. 처음 1시간 정도는 분위기 자체를 파악하느라 보냈다면, 나오기 전 30분 정도는 외로움과 약간의 창피함을 견디면서 보냈다. 더 오랜 시간을 있으면서 암스테르담의 밤을 제대로 즐겨보고 싶었는데, ISFP의 성격을 이겨내지 못한 채로 숙소로 돌아왔다. 아쉬움과 약간의 취기를 안은 채, 다음 날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르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