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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Sep 24. 2023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닌데(10)

암스테르담 - 평화로운 게 어색한 사람

암스테르담의 매일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복작거리지 않는 거리와 적당히 차분한 날씨 덕분이었다, 볼 것이 그리 많은 동네는 아니라 일정을 치열하게 잡을 필요가 없던 것도 한 몫 했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한지 3일만에 암스테르담 시를 구경하는 날이었다. 구경이래봤자  반고흐 미술관에 들렀다가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라고 불리는 하이네켄 박물관 겸 체험관을 돌아다니는 게 끝이었다. 

네덜란드는 스트룹와플과 더불어 팬케이크가 유명한데(더치팬케이크라고 한다), 쉬폰케이크처럼 폭신폭신한 식감의 두툼한 미국식 팬케이크와 다르게 더치팬케이크는 밀전병과 비슷한 쫀득한 식감이 특징인 얇은 팬케이크다. 좀 웃기게도 나는 이번 여행동안 두 개의 팬케이크를 비교해보고 싶어서 근처에 파는 미국식 팬케이크 집에 가기로 했다. 식당을 잘못 고른 탓인지 팬케이크는 맛이 그저 그랬다. 

후다닥 먹고서 반고흐 미술관으로 향한 나는 입장 시간 전까지 그 앞에 있는 공원을 돌아다녔다. 넓기도 넓은데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어서 탁 트인 공원에서 사람들이 놀고 있는 풍경은 어색할만큼 평화로웠다. 암스테르담 여행에서 이렇게 어색한 평화로움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주할 수 있었는데, 여행을 마치는 그때까지도 쉽게 적응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입장 시간이 다 돼서 반 고흐 미술관에 들어갔다. 네덜란드의 국민 영웅 정도로 칭송 받는 반고흐를 기리는 미술관은 생각보다 넓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유명한 화가들은 생전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 거라는 근거 없는 편견이 있었는데, 반 고흐는 꽤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걸 미술관에 가서야 알았다. 다만 반 고흐 미술관이라고 해서 모든 작품들이 다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화가인만큼 대표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예를 들면 <해바라기>와 <감자 먹는 사람들> 같은 작품은 반 고흐 미술관에 있었지만 '별이 빛나는 밤'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고, 유명한 <자화상>은 파리 오르셰미술관에 있거나 했다. 으레 그렇듯 미술관에서 보는 명작들은 큰 감흥이 없었다. 2014년 파리에서 본 모나리자도 그랬고, 이때 본 해바라기도 그랬다. 오히려 반 고흐가 영향을 받았던 다양한 사람들과 장면들을 흐름으로 보는 재미가 좀 더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반 고흐 미술관을 둘러보고서 점심을 먹으러 맥도날드에 갔다. 우리나라에 불고기버거가 있는 것처럼 어느 나라를 가든 로컬라이제이션이 잘 된 맥도날드는, 내가 해외 여행을 하면 꼭 들러보는 필수 코스 중 하나다. 중국에서는 자색 고구마 파이가 맛있었고, 독일에서는 이름이 기억 안나는 고기 파티인 버거가 맛있었다. 네덜란드는 버거는 특별히 땡기는 게 없었는데, 감자튀김에 나오는 프릿츠 소스가 따로 있었다. 아 ,그리고 네덜란드는 감자튀김을 케첩이 아니라 마요네즈에 찍어먹는다. 전날 갔었던 감자튀김 집에서도 양파와 커리소스, 그리고 마요네즈를 위에 뿌려준 것처럼 마요네즈가 디폴트 디핑 소스다. 차이가 있다면 네덜란드의 마요네즈는 우리나라에서 먹는 기름진 마요네즈에 비해 훨씬 담백하고 고소해서 요리에 넣어 먹어도 크게 부담이 없었다. 크리스피치킨버거와 같이 나온 프릿츠 소스가 바로 마요네즈 베이스의 소스였다. 감자 자체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에 뭘 찍어먹어도 그냥 맛있었다. 점심을 해치우고서, 해리가 꼭 가달라고 했던 미피샵을 가기로 했다. 도착한 미피샵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네덜란드 전통 복장을 입은 미피 인형들이 사이즈별로 있었고, 책, 컵, 도시락통 등등 미피 덕후들 눈을 뒤집히게 만들만한 곳이었다. 도착했다고 말했더니 해리가 바로 영상통화를 걸어서, 랜선 미피샵 투어를 시켜주고 선물까지 골랐다. 아직 일정도 남았기도 하고 더 싼 곳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냥 온 김에 미리 구매까지 마쳤다. 진짜 귀엽게 전통복장을 입은 큰 사이즈 미피인형과, 키링 정도의 사이즈의 작은 인형, 그리고 머그잔까지 알차게 챙겼다.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 예약했던 시간이 다 되어서, 바로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로 향했다. 2019년 칭다오에 놀러갔을 때 칭다오 맥주박물관에서 절대 까먹을 수 없는 맛의 맥주를 맛본 뒤로는, 세계 각지의 여행지에 주류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공간이 있다면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도 그 맥락에서 가게 됐다. 칭다오 맥주박물관은 칭다오의 역사와 생산 과정을 보여주는 '박물관'스러운 공간이었다면,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는 정말로 하이네켄의 가치와 색깔을 방문객들에게 전달하는 액티브한 공간이었다. 광고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기도 한만큼 그동안의 광고를 보여주는 구역도 있었고,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구역도 있었다. 안내를 해주는 직원분들도 이 브랜드를 같이 만들어가는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하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열정적이셨다. 게임을 하는 공간에서는 맥주 잘 따르기 대회, 빨리 먹기 대회 같은 이벤트도 열리고 있었는데, 다들 경쟁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하이네켄이라는 브랜드랑 연결돼서 더 신나보였다. 돌아다니면서 한두잔씩 마신 맥주도 너무 맛있었다. 칭다오에서 느꼈던 감동만큼은 아니어도 캔이나 병으로 마셨던 하이네켄 맥주보다는 훨씬 맛있었다. 투어 마지막에 있는 굿즈샵에서는 내 이름과 사진이 인쇄된 하이네켄 병맥주를 챙겨갈 수 있어서, 기념품까지 같이 두 손 가득히 나올 수 있었다.

맥주도 마셨겠다, 해리 선물도 샀겠다, 마음에 드는 기념품들도 샀겠다, 기분이 한없이 좋아지고 있었다. 두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많았고 오래 걸은만큼 다리가 아팠지만 그냥 이 상태로 암스테르담을 더 돌아다녀야겠다 싶었다. 어제 지나갔던 번화가도 한 번 더 돌아다니고, 괜히 운하 옆 벤치에 앉아서 해리가 추천해줬던 암스테르담 노래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적당히 술이 깰 때쯤 달고 짠 음식이 땡겨서, 근처에 있는 아시안 음식점에서 볶음면을 사먹었다. 저녁을 챙겨먹고 나오니 저녁 7시쯤이었다. 이미 2만 5천보를 넘게 걸었던 터라 오늘 하루정도는 좀 일찍 마무리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상태에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어색한 평화로움과 즐거움 덕분에 휴식의 즐거움을 한껏 만끽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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