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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로운 Sep 28. 2023

여행을 가려고 그만둔 건 아닌데(13)

암스테르담 - 사람은 물 가까이에 살아야한다 

격리 4일차에 접어들었을 때, 원래도 약했던 증상이 거의 없어졌다. 검사소에서 다시 오라고했던 날짜가 내일이었어서, 4일차 하루는 마스크를 끼고 좀 더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격리하는동안 가장 먹고싶었던 음식이 감자튀김이었던 터라, 바로 감자튀김을 사먹으러 갔다. 스페셜커리가 올라간 감자튀김을 처음 먹고나서 '여행 마치기 전까지 3번은 더 먹겠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3번을 더 먹었다. 감자튀김의 감동은 5일동안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감자튀김을 먹고나니 약간 흐렸던 날이 완전히 개어있었다. 이렇게 맑은 날의 운하를 꼭 눈에 담고 싶어서 바로 운하 옆에 벤치에 앉아서 암스테르담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가만히 멍을 때렸다. 보트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하고 인사도 나누고, 갈매기가 둥둥 떠서 물 흐름대로 떠내려가는 구경도 했다. 암스테르담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 내가 본 평화로운 풍경들이 바로 떠올랐으면 좋겠다 싶어서 열심히 귀와 눈에 암스테르담을 꾹꾹 눌러담았다. 한 30분쯤 멍을 때리니 또 적당히 걷고싶어졌다. 근처에 또 플리마켓이 열린다고해서 한참을 또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동물원 옆을 지나가기도 하고, 사유지의 정원이 있길래 사진을 찍었더니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물과 가까이 있는 도시라는 게 이렇게까지 부러울 일인가 싶었다. 도시가 평화로운 이유는 깨끗한 물과 자연이 있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도착한 플리마켓은 빈티지 의류 위주라 내 취향이 아니었어서, 한 바퀴 대충 둘러보다가 아까 보던 정원 쪽 구경을 마저하기로 했다. 정원 안쪽은 무슨 투어를 하고 있는 것인지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이 보는 풍경은 어떤지 너무 궁금했다. 들어가는 방법을 찾고싶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아쉬움 가득한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아팠던 터라 근처에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체력이 슬슬 떨어질 때라 카페인을 충전하고 싶었다. 빈 자리가 하나 있어서 앉았고 필름카메라를 테이블 위에 올려뒀더니 직원분이 관심을 가졌다. 사진작가냐고 묻길래 그냥 취미로 찍는다고 했더니, 자기는 사진작가라면서 본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알려주셨다. 사람을 피사체로 많이 쓰는 작가님이었는데, 사람들의 그림자 진 모습들을 흑백사진으로 담아내고 계셨다. 작가님께 비빌 수도 없었지만 나도 내 사진 계정을 보여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다. 작가님과 짧게나마 사진에 대해서 수다를 떨고 나오니 카페인도 충전됐고 기분도 괜시리 좋아져있었다. 온종일 먹은 것이 감자튀김 뿐이었어서 뭔가 다른 걸 먹고 싶었다. 문득 더치팬케이크 제대로 하는 집을 찾아가고 싶어져서 근처에 있는 더치팬케이크 맛집을 찾아냈다. 정말 좁고 가파란 계단을 올라가야 있는 2층에 있는 가게였는데,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는지 사람들이 거의 꽉차있었다. 원래는 예약을 해야 받아주는 곳인데 노쇼 고객님이 생겨서 빈 자리가 있다고 그냥 바로 앉으라고 했다. 메뉴판에 있는 조합을 다 먹어보고 싶었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딱 애플시나몬 팬케이크 하나만 시켰다. 잘 졸여진 사과와 슈가파우더, 시나몬파우더가 얇은 팬케이크 위에 적당히 올려져있고, 크림이 한 스푼 올라가있는 팬케이크였다. 사진을 찍고서 포크로 찢은 팬케이크를 입에 넣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물론 설탕이 많이 들어간 달달한 팬케이크여서 그랬겠지만, 사과도 팬케이크 자체도 너무너무 맛있고 조합도 잘 어울렸다. 옆테이블에 앉아있던 가족 손님들이 내가 먹는 걸 보고 애플시나몬 팬케이크를 주문하셨는데 내가 괜히 뿌듯했다. 가족단위 손님들은 친화력이 좋은 손님들이었는데, 사장님한테 근처 맛집을 소개해달라고 스스럼 없이 물어보셨다. 또 사장님은 이런 질문이 반가우셨는지 열과 성을 다해 맛집을 알려주시길래, 가족 손님들이 먼저 떠난 뒤에 내가 조심스럽게 '아까 가족 손님들한테 알려줬던 가게 알려달라' 고 요청했다.(결국 가지는 못했다.) 팬케이크에 유쾌한 사장님에 유쾌한 손님들까지 아주 유쾌한 것들로 가득한 경험이었다. 이 가게를 마지막으로 더 무리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숙소에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했다.

격리 5일차는, 암스테르담 둘째날 가지 못했던 볼렌담을 다녀왔다. 해리가 사진을 찍었던 다리에서 나도 같은 구도로 사진을 남기겠다는 일념 하나만 가지고 갔다. 볼렌담은 바닷가에 있는 소도시인데, 브라이튼처럼 사람들이 종종 바다보러 놀러가는 근교 도시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알록달록하고 세모난 지붕들로 가득한 마을이 나타났다. 이미 여러번 본 모습의 익숙하고 비슷한 건물이지만 또 바닷가 마을에서 보는 느낌이 색달라서, 괜히 카메라에 사진을 몇 장 더 담았다. 걷다보니 금방 바닷가가 나왔고, 테라스에서 밥과 술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한 해변 거리가 보였다. 해리가 사진을 찍었던 스팟도 찾을 겸 해변 도로를 걷기로 했다. 걸으면서 해변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랑 인사도 하고 주차된 차 밑에 있는 고양이 사진도 찍었다. 무슨 목적인지도 모르겠지만 해변 가까이에 잠겨있는 사람 형상의 목조물도 구경했다. 바다 멀리에는 요트를 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이 날은 이어폰을 두고와서 음악을 못들었는데, 음악 없이 일상의 소리를 듣는 것도 나름의 재미였다. 어쩌면 일상의 소리를 담아서 유독 그 풍경이 더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로를 따라 쭉 걷다보니, 해리가 사진을 찍었던 장소가 나왔다. 크지는 않지만 요트가 정박할 수 있을만한 덱이었는데, 셀카가 아니라 해리가 찍은 구도로 찍고싶어서 누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한 외국인 부부가 지나가길래, 붙잡고 해리가 찍힌 사진을 보여주면서 똑같은 구도로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인 아니면 사진 실력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발 밑에 여백을 남겨두고, 또 사람은 가운데로, 머리 가운데가 수평선에 걸치게 해달라는 디렉션을 정확하게 줬더니 한 3번 정도만에 같은 구도의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감사하다는 표현을 연신 보여주고나서, 나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변 거리 옆에는 사람들이 매트를 피고 앉을 수 있는 작은 공원이 있었는데, 서울에 있는 올림픽공원처럼 펼쳐진 잔디밭에 큰 나무 하나만 있는 공원이었다. 나는 매트도 돗자리도 없었어서, 그냥 팜플렛 하나 깔고 앉아서 멍을 때렸다. 아이들이 뛰놀고 파도 소리가 들리고 새소리가 들리는 그 풍경을 보면서, 옛날 유럽 고전 문학들의 무드가 딱 여기서 왔겠구나 싶었다.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책 읽는 것 외에는 할 게 마땅치 않았던 옛날에 이런 풍경을 보았다면 영감이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곳 같았다. 마음이 영감으로 가득 찰 것 같았지만 뭘 가져온 게 딱히 없어서, 그냥 그 영감이 떠오르는 풍경을 충분히 즐기다가 숙소에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내일의 일정을 잠깐 고민해보았다. 호텔은 오늘 밤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내일부터 묵을 곳을 다시 정해야했다. 내일 아침 검사 결과가 음성이면 바로 출국이지만 사실 증상이 사라진지 며칠 안됐기 때문에 그렇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물가가 워낙 비싼 네덜란드에 계속 머무르기도 부담스러워서, 차라리 귀국하는 비행기편이 저렴한 파리로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검사비용도 네덜란드의 거의 절반 수준이어서 파리로 가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갑자기 파리 일정이 추가되는 이 여행이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인생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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