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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Nov 07. 2023

스우파2와 수증기가 된 아저씨

열정과 무기력, 슬픔과 극복의 순환에 대하여 

여태 아이를 재운다. 재운다기보다는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준다는 표현이 적당할지 모른다. 아니, 사실은 그게 재운다는 것의 정의일 거다. 아이는 열 살이다. 태어나서부터 단 하루도 내가 재우지 않은 적이 없다. 수면 교육도 여러 번 실시했고, 아빠에게 왜 못 재우냐고 화도 내 보고, 예쁘게 방을 꾸며 며칠 따로 재워 봤지만, 결국 가장 효율이 높은 방법은 잠 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 


 자주 아이와 함께 잠들지만, 어떤 날에는 아이가 잠든 후에 방을 몰래 빠져나올 수 있다. 어떤 날은 주로 재밌는 TV 프로그램을 하는 날이다. 그런 날은 그 어두운 방에서, 잠드는 아이가 내보내는 평안한 기운들에 압도되지 않겠다는 정신력으로 온 힘을 다해 버틴다. 마침내 정말로 깊이 잠들었는지, 나지막하게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거나 손 끝을 건드려보는 최종 확인 방법을 거친 후엔 무사히 거실로 기어 나온다. 거실로 나온 뒤 10초가량 후에, ‘엄마, 왜?’라며 아이가 따라나오지 않는다면, 성공이다. 


요즘 나의 정신력을 강하게 하는 프로그램에는 나는 솔로, 스우파2, 싱어게인 등이 있다. 화요일이었고, 스우파2의 결승 무대가 있는 날이었다. 최종 생방송 무대, 관객석에는 유명한 연예인, 방송인들도 있었고, 일반인들도 한껏 멋을 내고 열기에 취해 들고 온 야광봉을 흔들고 누구 파이팅, 하며 고함을 쳤다. 그걸 본 순간 드는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스탠딩이네, 힘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관람을 위해 몇 시간을 줄 서서 기다렸을 테고, 또 공연도 줄 서서 본다면 적어도 네다섯 시간은 서 있는 걸 텐데, 어우, 나는 표 주고 애 봐준대도 못 간다,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포도가 시어서 안 먹는다고 하는 여우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각 팀의 무대를 보고 있자니 너무 멋있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몸이 부서져라 춤을 추는 댄서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무언가에 열망이 있던 때가 있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헤아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저런 곳엔 가지 못하겠지, 생각하며 조금 서글퍼졌다. 표를 구하려는 부지런함, 노력, 열정, 그 어느 것도 이제 나에게 없고, 무엇보다 아이를 위해서 체력을 항상 비축해 둬야 한다. 나는 원체 체력과 멘탈이 약했지만, 아니 또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기르면서부터는 체력이 방전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멀리 외출하는 삼갔다. 그것은 또 그것대로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무기력이라는 친구가 너무 자주 찾아왔다. 만나주지 않아야지, 다짐하면서도 번번히 문을 열어주었다.  


다음 날, 수요일 아침, 아이가 등교하고 떠난 자리, 허물 벗듯 늘어놓고 간 내복을 정리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지루한 하루가 또 시작됐구나. 집앞 마트에 가서는 한 봉지에 3800원이 된 상추를 몇 번이나 카트에 넣었다 빼면서, 이 물가는 미친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집에 돌아올 때도 오늘은 엘레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결국 엘리베이터를 선택했다. 


집에 온 후에도 최대한 집안일을 밍기적 미루면서 다시 드러누워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오전 시간의 TV는 시청 타켓이 나처럼 집에 있는 중장년층이기 때문인지, 어디를 틀건 당뇨, 만성질환, 관절, 협착증 등 온갖 질병에 걸려 안색이 좋지 않은 여자들이 ‘알면서도 자꾸 밀가루와 튀김 음식이 땡기고 눕고만 싶어요’라면서 우는 소리들을 했고, 그 사이사이 케이블 티비에서는 과장된 머리 모양의 쇼호스트들이 오메가3, 유산균 등 각종 건강 식품을 팔고 있었다. 그런 광고를 보면서 ‘어머, 저건 꼭 사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완전히 무기력의 이불에 덮혀 점점 눈이 감기는 기분이다. 다그치는 엄마보다 무기력한 엄마가 더 나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일단은 누워 있기로 했다. 리모컨을 마구 돌리다 불타는 트롯맨에서 멈췄다. 열 살 남짓한 아이가 몸을 구성지게 비틀어가며 남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늘 똑같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사건들이 가끔 일어난다. 나와 가까운 가족들에게 생기는 건강과 직장, 돈 문제 같은 것들, 더 넓게는 지인들에게 생기는 안 좋은 일들, 그리고 더 넓게는 나라에 생기는 참사, 먼 나라에 일어나는 전쟁 소식 등 갑작스러운 소식을 접할 때면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루한 게 아니라 행복한 거라고. 아니, 그렇게 행복한 일상을 내가 왜 지루하게 느꼈던 것일까, 반성하고 다시금 아무 일 없는 일상이 주어진다면 절대로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뒷산에 산책을 하러 갔을 때였다. 산 입구에 경찰차가 여러 대 와 있는 것을 보았다. POLICE LINE이 둘러져 있었고, 경찰들과 웅성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멀찍이 서 있다가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엿들었다. 뒷산에서 어떤 남자가 목을 매 죽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내가 사랑하는 곳이었다. 집에서 출발해 한 바퀴 돌면 40분 내외가 걸리는 만만한 산책길, 코로나 시절 갈 곳 없을 땐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가 마스크를 벗고 있던 곳, 외롭거나 운동이 부족하거나 울고 싶을 때 언제라도 가는 그곳, 예쁜 나무 데크길이 조성돼 있고 나무와 새들이 있는 곳, 도시만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내가 처음으로 자연에게서 위로받는 느낌을 알게 해준 곳, 그곳은 나에게 집처럼 편안하고 엄마처럼 아낌없이 내어주며 언제라도 연락해서 볼 수 있는 친구 같은 소중한 곳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생을 마감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목을 맬 도구를 준비해 왔을 것이고, 어느 나무에 목을 매야 단번에 성공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에게 그 산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름다운 나무와 새들이 있는 풍경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자꾸만 그의 마음에 이입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남자지만, 내가 사랑하는 곳을 죽음의 장소로 택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와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고, 슬픔이 육체 곳곳으로 스몄다. 나는 집에 돌아와 수시로 울었고, 또 그걸 핑계 삼아 바닥에 누워 TV를 틀었다. 마침 싱어게인2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생방송으로 보지 못해 너무 보고 싶었던 프로그램이었지만, 슬픈 노래가 나올 때마다 그 남자 생각이 나서 눈물이 쏟아졌다. 손수건 몇 개를 적신 후에야 나는 TV를 껐다. 그럼에도 나는 슬픔의 파장에서 헤어나지 못해 몸을 가누기가 조금 힘겨웠다.


오후 두 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왁자지껄한 여자아이들이 쳐들어 왔다. 아이가 친구들을 데려온 것이다. 아이는 보통 하교 후 한 시간 정도는 놀이터에서 놀다 오는데, 그 날은 우리 집으로 친구들을 데려왔다. 잠옷 바람에 누워서 울고 있던 나는 후다닥 눈물을 닦고 머리를 묶고 아이들을 맞았다. 

 “어머, 너네 오랜만이다? 간식 줄까?”

 "엄마, 저번에 먹었던 핫도그 있어? 그거 맛있던데."

 "어, 그거 있어, 데워 줄게."

 재재거리는 여자 아이들을 보자 목소리가 자동으로 솔, 톤으로 올라가고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들은 우당탕 거리며 거실의 피아노도 치고, 아이의 잠옷도 빌려 입는다. 퍼즐도 맞추고 레고 더미도 꺼내 부지런히 뭔가를 만든다.

 “여기가 수영장이야. 근데 너무 높아서 여기서 다이빙하면 바로 죽는 거야.”

 “맞아, 바로 죽어서 여기 있는 귀신의 집에서 알바를 하는 거지.”

 "얘들아, 과자 부스러기 흘리지 말고 여기 접시에 대고 먹어라."

 저들끼리 척척 죽이 맞아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바닥을 훔치는 동안 슬픔의 농도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한때, 죽음이 너무나 두렵게 느껴질 때, 나는 삶이 형체가 있는 얼음이라면, 죽음은 수증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볼 수는 없어도 존재하는 것처럼, 죽음 역시 그러하다고 말이다. 얼음에서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듯이, 그리고 다시 온도가 낮아지는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얼음이 되듯이, 죽음과 삶은 여건에 따라 오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이 조금은 덜 두려웠다. 


아이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만들며 놀 동안 나는 과일을 깎고 간식 비닐을 벗겨 냈다. 단감의 감촉을 느끼고 여자 아이들의 새된 비명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렇게 수증기의 세계에서 다시 얼음의 세계로 돌아왔다. 엄마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때로 무기력해지고, 또 때로 다시 살고자 하는 의욕으로 가득 찬다. 수증기와 물, 얼음이 서로 오가듯이. 그때그때의 온도에 따라. 


수증기가 된 아저씨는, 얼음일 때보다 훨씬 행복하고 자유롭길 바래 본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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