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준비 중인 언니가 안 입는 좋은 옷을 잔뜩 보내주었다. 박스에는 부들부들한 스웨터, 점퍼, 스카프 등 탐스러운 옷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신입들이 들어왔는데, 옷장에는 공간이 없었다. 대충 구겨 넣으려고 하다가,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정리하겠나 싶어 안 입는 옷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대대적인 옷장 구조조정이 단행되었다.
어느 잡지에선가, 2년 동안 안 입은 옷은 버려야 한다, 는 말을 본 것 같다. 하지만 내 옷장에는 십 년이 훌쩍 넘도록 안 입는 옷들도 꽤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안 입는데 버릴까, 그래도 몇 번 못 입었는데 아까워’라는 마음에 끼고 있던 옷들이다. 직장 다닐 때 꽤 거금을 주고 산 자켓, 원피스 등은 그렇게 계절이 넘어갈 때만 잠깐씩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금 어두운 옷장으로 들어가 십여 년을 보낸 것이다.
오케이,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마음으로 옷들을 마루에 쏟았다. 하지만 정리를 하자니, 예전과 똑같은 생각의 흐름으로 넘어가려 했다. 안 입으니 버려야지-하지만 너무 새것이잖아, 아까운데, 언젠가는 나도 다시 회사를 나간다거나 뭐 공적인 그런 일에 연루될 수도 있어, 그럼 그때 또 옷을 사야 하는데, 돈도 아깝고 환경 파괴에도 일조하는 거야, 안 그래?-그럼 일단 가지고 있자.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쩐지 단호해져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좀 그만해, 구질구질도 정도가 있잖아.-음, 그런가, 알겠어, 그럼. 한번 버럭 화를 냈더니,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는 ‘짠순이 절약 자아’였다.
이번만큼은 좀 냉정하게, 최근 2-3년간 손을 댔느냐 안 댔느냐를 기준으로 삼으며 해고 목록을 작성했다. 이로써 해고 명단에 오른 옷들은 오른쪽, 아닌 옷들은 왼쪽으로 분류했다. 분류를 마치고 나서 나는 오른쪽과 왼쪽이 각각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선 해고 대상이 된 오른쪽 옷들은 놀랍게도 모두들 상태가 좋았다. 헤지거나 옷감이 상하지 않은 외출복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유행이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반대로 살아남은 옷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었다. 주로 집에서 입는 파자마나 면티는 후줄근하거나 색이 바래도 버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나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홈웨어는 오래되고 상할수록 더 버리기가 힘든 느낌마저 들었다. 나이가 들어 키가 줄고 주름이 패일수록 더 애틋해지는 엄마 같다고나 할까.
우리가 쟤들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아름답고 매끈한데 왜 우리가 구조조정되는 거예요? 라고 오른쪽 옷들이 물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들킬 것 같아 그들을 외면하면서 애써 건조하게 대답했다. “너희들이 아름답지 않아서 버려지는 게 아냐, 단지 적자가 아니어서 생존하지 못했을 뿐.”
적자생존이라는 말에서 적자는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환경에 가장 적합하다는 뜻이다. 최재천 교수는 그의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특정한 상황에서 강자는, 힘과 공격성 때문에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 있고 반대로 약자는 친화력과 다정함을 발휘해 살아남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몸집이나 공격성이 더 좋았지만 네안데르탈인 대신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았고, 티라노 사우르스 대신 중소형 공룡이 살아남아 지금의 조류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해서 아름답고 매끈한 외출복들은 후줄근 홈웨어들에게 패배한 채 초록 의류함으로 사라졌다. 안녕, 잘 가! 옷장 속에 너무 오래 있게 해서 미안해. 나는 그들이 비행기를 타고 동남아나 아프리카로 멀리 날아가 한껏 사랑받는 ‘적자’가 되길 바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