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깨달았지만 고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스마트폰을 많이 써서 거북목이 되었다는 걸 알지만 틈만 나면 폰에 손이 가고, 빨리 먹으면 체하기 쉽다는 걸 알면서도 오랜 습관으로 제대로 씹지 않고 넘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땐 집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밖으로 나가 후회할 짓을 저지른다.
며칠 전, 아이의 겨울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삼시세끼 차리고 아이 뒤치다꺼리에 공부 봐주고 놀아주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다. 더욱이 이번 방학엔 아이가 자주 아파 학원도 거의 보내지 못하고 내내 끼고 있었다. 딱 4시간만 쉬어 봤으면... 다시 신생아 키우는 듯 녹초가 되었다. 개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이가 친구 집에 놀러가서 저녁을 얻어먹는다고 했다. J 엄마에게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그렇게 원했던 자유 시간이었지만 막상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니 초조했다. ‘그렇게 원했기 때문’에 이 시간을 아주 보람 차고 즐겁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던 듯하다. 이 소중한 시간에 집에만 있을 순 없지! 어디 분위기 좋은 카페라도 가야 하나? 하지만 혼자서? 쇼핑? 주말이라 붐빌 텐데, 사람 많은 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미용실에 가기로 했다. 안 그래도 염색할 시기가 한참 지났고, 미용실은 아파트 상가에 있어 가까웠으며, 그곳 사장님이 머리 감겨줄 때의 손맛이 아주 좋았으므로 나는 출발 전부터 기분이 나른해져 있었다.
내겐 단골 미용실이 있다.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다니는 곳이다. 다른 곳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저렴해 늘 사람이 많다. 워낙 손님이 많아 나는 그녀가 나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두루뭉술하게 질문을 던져 마치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머리 한 지 좀 오래 됐네요’라든가 ‘아이 방학이라 힘들죠?’하는 식이다. 사실 정말 시간과 돈이 남아돌지 않는 이상 미용실에 자주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특히 이곳처럼 저렴한 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머니가 가벼운 여자들일 테니, 대부분 원할 때보다 몇 개월 정도는 늦게 머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 한 지 좀 오래됐네요’라는 질문에 대부분 해당이 될 것인데, 나처럼 매사에 경계심을 갖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머, 이 사장님 나를 알고 있구나! 라면서 감동하게 될 것이다. ‘아이 방학이라 힘들죠?’도 마찬가지다. 대충 내 나이를 보고 때려맞추는 것이다.
단골 미용실에는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이미 세 명이 머리를 말거나 자르고 있었고, 네 명이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기다릴까 아니면 집에 갈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제 3의 대안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미용실에 가 보는 건 어떨까? 마음은 양분되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오늘은 쉬자는 차분한 자아와 지금 당장이 아니면 안 된다고 떼를 쓰는 도파민형 자아가 충돌했다. 마음이 편안할 때는 전자가 이기지만, 기분이 다운되어 있거나 힘들 땐 후자가 이기게 마련이다. 그날은 도파민형 자아의 승리였다.
상가 1층에 M이라는 이름의 미용실이 있다. 오가다 봤지만 한번도 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 단골 미용실은 안이 훤히 들어다 보이고 밖엔 ‘염색35000원’이나 ‘학생펌 25000원’ 같은 a4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반해 그곳 M은 밖에서 안이 잘 보이지 않고 ‘예약제’라는 안내가 붙어 있다. 한마디로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일 텐데, 그날의 나는 충동적으로 그곳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저, 예약 안 했는데 머리할 수 있나요?”
주인 여자가 나를 돌아봤다. 한 손님의 머리를 롯뜨로 마는 중이었다. 주인은 50대 정도로 보였고 단발머리에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원래 예약제인데 마침 손님이 적어서 할 수 있겠어요.”
목소리는 차분한 저음이었고 머리는 아랫부분이 안으로 말리는 깔끔한 단발이었다. 가게도 깔끔했다. 적갈색 우드 재질의 인테리어가 세련된 느낌을 줬고 대기석에는 꽤 큰 책장이 있었다. 하지만 가격표는 보이지 않았다. 몇 해 전부터 시행된 정책으로 미용실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어야 했는데,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대기석에 앉았다. 다시 한번 침착한 자아가 등장해 도파민형 자아에게 재촉했다. 딱 봐도 비싸잖아, 그만 가자. 그러자 도파민 자아는 못 들은 척 앞만 보다가 책장에서 뭔가를 발견해서 침착한 자아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법륜 스님의 책 ‘지금 이대로 좋다’였다. 이것 봐! 주인은 이런 책을 읽는 여자야, 좋은 사람이 분명하다고. 정직한 사람이 분명해. 침착한 자아가 솔깃했다. 어, 정말 그런가 싶어서 돌아보니 책장에는 좋은 책이 많았다. 죽음학의 대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도 있었고, 박완서의 소설도 있었다. 내 단골 미용실에는 책이라곤 애들 보는 학습만화 몇 권과 우먼센스 같은 잡지뿐이었다는 것이 떠올랐고 갑자기 미용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급상승했다. 그래, 이런 사람에게라면 조금 비싸더라도 내 머리를 맡길 수 있겠어!
나는 법륜 스님을 좋아한다. 작년에 심신이 지쳤을 때, 누군가 법륜 스님의 유투브를 추천해줬다.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스님이 조언을 해주는 형식의 고민상담소였다. 고민들은 가지각색이었고 정말 저 사람은 힘들겠는데 어떤 말을 하실까? 싶은 이야기에도 스님의 답은 명쾌했다. 디테일한 것을 빼고 골자만 말하자면 스님의 지론은 이렇다.
우리는 모두 별로 특별할 것이 없고, 인생 또한 별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삶이 지금 그대로 위대해진다!
“음? 13만원이요?”
차례가 되었을 때, 도파민형 자아가 튀어나와 충동적으로 물었다. 염색 대신 파마를 하고 싶다고 비용을 물어본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큰 돈이었다. 단골 미용실에선 7만 원이면 파마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침착하게 ‘네, 그럼 해주세요’라고 대답했다. 헐, 침착한 자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는 여자들 미용실 가면 이삽십은 기본으로 쓰고 온다는 말을 들었다. 뭐 직장 다니고 돈이 여유 있는 여자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7만 원짜리 파마도 1년에 한 번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남편이 워낙 검소한 스타일이고 내가 돈을 못 벌기 때문에 ‘내 머리 따위’에 돈을 쓰기는 자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어차피 매일 묶고 다니고 봐줄 사람도 없는데, 라며 한결같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이글거리는 도파민 자아에게 충동적으로 멱살을 잡히고 만 것이다.
사장님은 머리를 하는 데 세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렇게나 오래요? 가격이 비싸니 시간도 길구나 생각했다. 나는 머리를 말고 기다리는 동안 법륜 스님 책과 엘리자베스 퀴블러 박사의 책을 읽었다. 내 자신이 아주 고급스러워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분명히 ‘열펌’이라고 했는데, 머리에 열을 내는 기계를 연결하지 않았다. 뭐 언젠가 하겠지, 생각하며 계속 기다렸다. 지루한 두 시간 반이 지났을 때 사장님이 샴푸실로 가자고 했다. 머리를 감고 다시 기계를 쓰는 건가? 생각하며 나는 샴푸 의자에 앉았다. 가장 기대되는 시간이다. 시원하게 머리를 박박 긁어주면 정말 기분이 좋다. 까무룩 잠이 들 것 같다. 이 미용실은 더 고급지고 비싸니까 마사지도 얼마나 시원할까, 나는 잔뜩 기대를 하고 샴푸 의자에 기대어 누웠다.
“다 됐어요.”
슥슥 샴푸를 씻어내곤 끝이었다. 네? 아직 시원한 두피 마사지를 받지 못했는데, 그녀는 나를 일으키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건 아니죠! 나는 속으로 외치면서도 그녀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나는 다시 거울 앞에 앉았고 그녀는 말했다. 커트 조금 하고 마무리할게요. 네? 이렇게 끝난다고요? 나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열을 내는 기계도 쓰지 않았고 두피 마사지도 없었다. 마침내 드라이를 하는 마지막 공정에 이르렀다. 나는 이제 거의 체념 상태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머리는 예전과 별다를 게 없었다. 바글바글하게 컬을 내는 게 촌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싶었다. 사장님이 만져주는데 이 정도면, 내일 감아 버리면 다시 도루묵일 것 같았다.
“두상이 예뻐서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쵸?”
사장님이 주위 손님들을 둘러보며 호응을 유도했다. 단골들인 듯 사장님의 말에 크게 호응해주었다. 거울 앞에 놓인 법륜 스님의 책이 이제는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다는 원효 대사의 해골물 이야기가 떠오를 지경이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내 머리 어때, 물으니 괜찮네, 라고 대답한다. 만 원짜리 티셔츠도 비싸다면서 몇 번이고 고민하는 남편에게 이 머리 13만 원 주고 했어, 라고 말하면 뒤로 벌렁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가격 같은 건 묻지 않았다.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삶이 별것 아닌 줄 알면 삶은 있는 그대로 위대해집니다. 법륜 스님의 말이 맴돌았다. 그 미용실이 특별할 거라고 생각한 건 나였다. 이번엔 좀 비싼 곳에서 머리를 해보자는 것도 내 생각이었다. 좋은 책이 많으니 서비스도 실력도 좋을 거란 것도 모두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파마가 별것 아닌 줄 알면 내 머리는 있는 그대로 예쁜 거였다. 나는 거울을 보며 13만 원으로 할 수 있었던 다른 좋은 것들을 떠올렸다. 근사한 외식이 서너 번, 괜찮은 가방 하나, 신간 예닐곱 권, 6개월은 족히 먹을 김치 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