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인 아이는, 저학년 대상 동화책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학습만화를 너무 많이 사줘서 그런가, 동영상에 일찍 노출이 되어 그런가 자책을 하며 어떻게든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학교에서 내 주는 독후감 숙제에 맞춰서 겨우 읽고, 독후감도 몇 시간의 몸부림 끝에 몇 줄 적어내곤 했다. 나는 속으로 '아니, 얘야, 그래도 엄마가 글 쓰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하다가, 나도 어릴 적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나는 책이 싫었다. TV가 좋았다. 반짝반짝한 화면과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대화가 재밌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좋았다. 음악을 들으면 지금 내가 있는 자리보다 더 멋진 곳에 갈 수 있는 것 같았다. 친구들하고 노는 게 좋았다. 인기도 별로 없고 딱히 재주도 없었지만 아이들이 고무줄하고 공기 놀이하는 틈에 얼굴을 디밀고 있는 게 좋았다. 문방구에 놓여 있는 알록달록한 지우개 구경을 하는 게 좋았고 엄마랑 시장에 가서 만두를 얻어먹는 게 좋았다.
그럼 언제부터 책이 좋았을까? 생각하면, 너무 심심한데 놀 사람이 없을 때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진짜로 놀 사람이 없었던 때, 또래집단에 잘 끼지 못하던 때, 책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교육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흔히들 '꾸준히' '어려서부터'를 강조한다. 연산은 꼭 어릴 적부터 해야 한다는 둥, 초등 독서 습관이 평생을 간다는 둥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지 않아서인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차분히, 한 스텝씩 계단을 밟듯 흘러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꼭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전무한 독서 습관에서 어느 중학교 방학, 열 권짜리 태백산맥을 읽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2권과 5권, 9권 정도에 있었던 성애 묘사 장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5권인가에 있던 페이지는 접어놓고, 수시로 다시 읽었다. 한복 속을 거칠게 헤집는 사내의 손,, 어쩌구 하는 묘사들을 나는 수십 번 반복해 읽으며 나는 '나는 이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뭐 그런 것들이 동력이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태백산맥을 완독하고 전라도 사투리를 흉내내며 말하기도 하며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땅이 마음 속에 생기는 것, 이란 사실을 알았다.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면, 옆의 사람들도 내가 뭘 보고 듣는지를 알지만, 책을 읽으면(물론 그 책을 읽은 사람은 나름 추측할 수 있겠지만) 내가 뭘 상상하고 있을지 다른 사람이 짐작할 수 없다. 그 비밀스러움이 좋았고,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내 마음속 영토가 넓어지는 느낌도 좋았다. 마음에 안 들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친구들과는 달리, 재미가 없거나 설교하는 듯하면 함부로 탁, 덮어버릴 수 있다는 점도 독서의 장점이었다.
그렇게 나는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건너 뛰고 성인 소설로 진입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아이에게 읽히기 위해 동화를 읽기 시작했다. 독서 전문가들이 말하는 순서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라든가 파브르 곤충기 같은 것도 처음 읽었는데,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나를 닮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꽃게 엄마여서, 나는 그래도 아이는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지만, 아이는 차근히, 정해진 대로 하길 바란다. 그림책 - 저학년 문고 - 중학년 문고 - 고학년 문고 - 청소년 소설 - 성인 소설, 이렇게 순서대로 읽었으면 좋겠다. 왜냐고? 그래야 내가 통제할 수 있으니까.
나: 자, 이제 너도 3학년이 되었으니, 이런 걸 읽어보렴, 이런 게 너의 두뇌 발달과 정서 함양에 좋아. (나는 그러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전문가들이 그러더라.)
딸: 네, 엄마, 너무 감사해요. 잘 읽을게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으니까. 하지만 딸은 무척 나를 닮았다. 그녀는 3학년 여름 무렵부터 성인 소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동화책이 너무 교훈적이라서 그런가 싶어 '학교가 싫어' '너랑 절교할 거야' 같은 제목의 책으로 미끼를 던졌지만, 그것도 금방 간파해버렸다. '이런 책들은 뻔해, 결국은 학교가 좋아지고 친구랑 화해한단 말야.' 이... 이럴 수가... 그걸 간파하다니, 내가 당황하면서도 감탄하고 있으면 아이는 흔한남매 만화책을 펴곤 했다. 너무 많이 봐서 테이프로 붙이고도 너덜거리는 흔한남매 만화책...
이건 뭐야? 라면서 아이가 어느 날 일본 소설집을 책장에서 꺼냈다. '오늘의 요리'라는 제목으로 요리를 테마로 묶은 단편 소설집이었다. 벼룩시장에서 천 원 주고 샀다가 읽지 않았던 책이었다. 표지 일러스트는 주방 도구와 음식들이 귀엽게 그려져 있어 아이의 관심을 끌 만했다. 그냥 넘겨 보다 말겠지, 했는데 아이가 제법 오래 읽는 게 아닌가. 뭐지, 갑자기 이 집중력은? 만화책이 아닌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기특해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묻는다. '처녀가 뭐야?' 음... 기분이 쎄해서 보니까, 생각하는 그것이 맞았다. 나는 결혼 안 한 여자, 라고 설명해주고 잠깐만, 하며 책을 빼앗아 휘릭 넘겨 봤다. 알록달록, 귀욤귀욤, 말랑말랑해 보여도 성인 소설은 성인 소설이다. 곳곳에 성적인 대화들이 배치돼 있었다. 나는 아하하, 아직 네가 볼 책은 아닌데, 하고 운을 띄웠는데 그것이 아이를 더 자극했는지, 재밌는데? 라면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후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넷플릭스는 12세, 15세라고 나오기라도 하지, 책은 애매하다. 한번은 또 집에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 소설을 들춰보길래, 니가 뭐 얼마나 보겠어, 하고 뒀더니 100페이지를 읽고 접어두었다. 그리고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나도 제대로 안 읽은 책이라 아이 없을 때 읽었는데, 살인 장면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잔인해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다른 책으로 유도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아이는 (생각지 못한 방향이었지만) 독서를 좋아하게 되었기 떄문에, 나는 이도 저도 못하고, 그저, 좋아하면서도 불안해 할 뿐이었다.
커가는 아이를 보자면, 뭐랄까, 더 이상은 내가 조작 불가능한 컴퓨터 같은 느낌이다. 내가 아는 선에서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을 실행해 보면, 어떨 땐 의도한 대로 돌아간다. 하지만 자고 나면 금세 못 보던 버튼이 생겨나고, 호기심에 눌러보면 '당했지, 요놈' 하는 느낌으로 알 수 없는 방정식들을 쏟아낸다. 그러면 나는 또 두려운 마음에 허겁지겁 종료 버튼을 누르거나 본체를 탁 덮어버리고 한동안 외면하다가, 다시금 주위를 서성거린다. 그렇게 고작 6개월에서 1년 남짓 적용 가능한 매뉴얼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업데이트 속도에 따라가지 못해 우왕좌왕하다가, 어느새 업그레이드되어 한동안 안정되게 돌아가는 모습에 감탄하기도 한다.
무수한 교육서와 교육 전문가 들의 말을 (참고는 하되) 맹신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내 아이에게는 내 아이만의 매뉴얼이 있고, 또 그 매뉴얼은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데, 나와 아이를 포함한 그 누구도 언제 어떻게 업데이트되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두려워도 끊임없이 버튼을 눌러보고, 놀라고, 기겁하고, 강제 종료시켰다가도 다시금 본체를 열어 들여다보는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아닐까, 라고, 오늘도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