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집 근처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1년 남짓의 계약직이지만 오랜만에 조직에 속하는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공간이 주는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 다른 학교 도서관을 가보지 않아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이 학교 도서관은 특히나 크고 아름다운 것 같다. 2년 전에 리모델링을 해서 시설이 새것인 데다가, 도서관 겸 아이들 휴식 공간으로 쓰이고 있어 공간을 넉넉하게 만든 것 같다.
처음 일하게 되었을 때는, 특별한 문화행사나 이벤트를 열어서 아이들이 많이 오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는 일본 작가 우치다 다쓰루의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뿐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아니 오히려 그 편이 좋다는 메시지에 아싸, 신난다,라고 생각하며 그저 도서관을 지킬 뿐이다.)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는 제목을 보고는 잉? 정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요즘은 어느 도서관엘 가나 북토크라든지, 다양한 이벤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 근처 도서관엘 몇 년 동안 들락거리면서 그런 분위기에 젖어 들어 그런지 그런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처럼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사서들이 노력하는구나, 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치다 다쓰루 아저씨는, 도서관의 본질은 종교시설 같은 거라면서, 기본적으로 정갈하고 신성한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도서관은 읽고 싶은 책을 빌리러 가는 장소도, 무언가를 조사하러 가는 장소도 아니다. 물론 그런 기능도 있지만 최대의 기능은 무지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도서관은 우쭐대지 말라며, 이용자의 콧대를 꺾는 일침을 놓는다."
오, 듣고 보니 정말 그러하다. 같은 도서관이라도 인기 있는 책을 빌리거나 아이 교육이나 건강, 재테크 같은 정보를 찾으러 갈 때의 기분과, 목적 없이 서가를 돌아다니다가 '이런 책도 있구나,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이 이렇게나' 하고 느낄 때의 기분은 확실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전자가 일상의 연장이라면 후자는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지는 여러 개의 문 앞에 서는 기분을 준다.
"사서는 문지기다. 문지기는 다른 세계로, 외부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현세의 현실적인 가치관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 그 '지하 2층'에 내려가면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과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지하 2층에 계속 머물면 위험하니까 제한 시간이 넘으면 슬쩍 현실 세계로 데려와야 한다. 바로 그때가 문지기의 수완이 빛을 발할 때이다."
문지기라니! 그 책이 내 것이라면, 형광펜을 박박 치고 싶은 표현이었다. 신규 사서로서, 다독 학생들을 뽑아 상품을 준다든지, 아이들을 위한 도서 추천 리스트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들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마음의 부담을 가졌는데, 이 글을 읽고는 문지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보다는 나부터가 도서관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신성한 마음으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공간으로서 도서관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도서관을 종교시설과 유사한 곳이라고 말한다.
"아침에 자신이 담당한 도서실 문을 열면, 10시간 가까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장소의 독특한 분위기가 풍기죠. 고요함 속에 잠긴 서가를 향해서 무심코 손을 합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많은 책이 꽂혀 있는 장소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신사나 절과 비슷한 분위기가 나죠."
실로 그렇다. 불 꺼진 도서관에 들어가 불을 켜고 서가를 거닐다 보면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사람 없는 절이나 성당에 들어갔을 때 그런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책 한 권 한 권이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다. 나는 그 수많은 문들 앞에서 '며칠까지 돌아오면(반납하면) 됩니다'라고 안내하는 문지기 같은 사람인 것이다. 우치다 아저씨의 글을 읽고, 나는 출근해 도서관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밤 사이 별고 없으셨는지요. 제가 감히 입장합니다.
아무도 없는 서가를 지그재그로 걸어 다닐 때, 나는 울고 싶어진다. 특히나 오래되고 색이 바랜 책들이 많이 꽂힌 서가를 지날 땐 더더욱 그렇다. 그 하나의 책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작가들, 출판사 직원들, 책 납품 업체 직원들 등 다양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독재 정권 하에서 정부 비판 내용을 쓰면서 위험에 처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세계 각국의 도서를 사전을 찾아가며 번역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자연을 찾아다니며 아름다운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 그들 하나하나의 삶을 상상해 본다. 책을 만들며 즐거웠을까? 힘들었을까? 다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지금도 책을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어떠하든, 그 사람들의 노력이 타입캡슐처럼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가 그 책을 열어 읽으면, 그들은 독자의 시공간 속에서 잠시나마 살아 움직이고 책을 덮고 서가에 들어가면 다시 죽음과 같은 멈춤이다. 내 손으로 작은 삶과 죽음을 연출한다는 것이 나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신비로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면서 나는 시간의 흐름에 압도된다.
서가들의 배치를 볼 땐 때로 웃음이 나면서도 이토록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 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경이로움을 느낀다. 특히, 200번대의 종교 서가와 300번대의 사회과학 서가는 우리 도서관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담고 있는 내용이 상반되다 보니 나는 그들 사이에 서면 우리 집에 왜 왔니, 를 부르면서 서로 대립하던 어릴 적의 놀이가 생각난다. 사회의 불평등, 부조리, 정치경제적 난제들을 다루며 지금 당장 행동하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사회과학 서적의 맞은편에는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인생은 본래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읊조리는 종교 서가가 있다. 접점이 없지는 않겠지만, 사회과학은 인간의 행동을 촉구하고 종교 서적은 인간의 마음 다스림이 주 종목이다 보니, 서로 양보 없이 대립하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인간은 이렇게도 다양하게 사고할 수 있을까? 고통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도 분석하고 저렇게도 생각한다니. 나는 두 서가 사이를 지날 때면, '워워, 괜찮아요, 아주 다른 것들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모두 필요한 것들이에요'라고 말하면서 둘 사이를 조율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아마 나는 1년 남짓, 이 아름답고 광활한 공간에서 문지기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될 때, 나는 아마도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의 고요하고 으스스하면서도 울고 싶어지는 이 순간들을 자주 떠올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