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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아 헤맨, 선생님이 입으셨던 좋은 니트 카디건.

텀블벅 펀딩 달보드레 가디건의 뒷 이야기.

by 금토록

전학을 왔었던 여름을 지나 날이 쌀쌀해질 무렵, 당번으로 혼자남아 창문을 청소하던 나에게 선생님이 말을 거셨다.


"토록아 힘들지는 않니?"

"네?"


내가 깨끗이 닦던 창문에선 저녁이 다가옴을 알리는 노을이 쏟아져내려, 선생님이 입은 흰 아이보리 카디건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힘들었던가? 선생님의 눈엔 학교생활에 적응 못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아버지가 보고 싶지는 않니?"


창문을 닦던 손을 멈추고, 그제야 선생님의 말뜻을 이해한 나는 의외의 마음을 갖고 선생님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저 다정하게 물어보는 안부라는 걸 알지만 카디건에 이어 내 두 볼이 이제 붉어졌다. 애써 너털 웃음을 지으며 대답.


"네. 오히려 없는 게 이제는 익숙해서요."


선생님이 그 뒤에 어떤 반응을 하셨고, 우리가 뒤에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외로웠던 학창 시절 동안 이런 다정한 안부를 건넨 선생님은 이분이 처음이셨으며, 선생님이 입었던 가디건이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는 것.




날이 부쩍 추워졌죠. 짧은 낮동안 옷장정리를 하다 보면 쿰쿰한 나프탈렌 향기가 해가지도록 방안에 맴돌 시기네요. 저는 이번 겨울이 오기 전 '옷'을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지인들은 '갑자기?'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어요. 그 뒤에 붙는 말은 '그것도 니트를 만든다고?'



정확히는 '니트 카디건'을 만들었습니다.


(+) 저희 의류 패턴 디자인을 맡아준 팀원 릴리가 쓴 글입니다.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제 글을 읽고 비교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cafe.naver.com/ggong2/1066566?tc=shared_link





'니트 가디건'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옷 자체가 주는 '다정함'을 사랑합니다. 그 '다정함'이 어떤 건지 아실까요?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학창 시절 선생님들은 다들 가디건을 걸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 왜 선생님들은 유독 카디건을 많이 입으셨을까요? 두꺼운 외투를 입고 수업하기는 어려워서겠죠? )


교실 창가에 해가 들면 가디건의 살짝 일어난 보풀이 반사되어 나풀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을 뵈러 교무실에 가면 뜨거운 히터바람에 가디건은 의자에 걸쳐져 있거나 무릎 위 담요가 되어 행색을 바꾸었죠. 그날 집에 가서 열심히 인터넷으로 가디건을 찾아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갖고 있는 보풀이 반사되어 나풀거리는 그런 포근한 가디건은 찾을 수 없었거니와,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지만 아주 비싼 모 브랜드의 명품 카디건이었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봄 저는 학교를 자퇴하게 됩니다. 사회로 나온 저는 엄마를 졸라 겨우 입게 된 교복 위에 걸치는 검은색 가디건이 아닌, 저가 사입을 수 있는 가디건을 즐겨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저가 '원하는 가디건'은 살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엔 아크릴과 나일론으로 짜인 조명에 실이 반짝이는 니트를 입는 게 재정적으로 최선이었죠. 그래도 저는 행복했습니다. 직접 돈을 벌어서 세일할 때를 기다리며 이월 상품일지라도 갖고 싶은 옷을 산다는 건 굉장히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염색과 파마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머리, 청바지와 흰 티 그리고 캔버스화를 신은 단벌신사. 제 첫사랑에 대한 기억입니다. 새로운 옷을 시도하는 걸 즐겨하지 않던 그에게 굳이 좋아할 내색이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없는 돈을 모아 선물했던 옷도 가디건이었죠. 선물한 가디건은 그의 옷장에서 자주 꺼내지지 못했지만 저는 그가 한 번이라도 입어준 거에 만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헤어지고 나서도 그의 옷장 속에 있던 가디건이 가끔 생각났었는데, 그때의 저는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게 밖에 마음을 전달하지 못했던 거겠죠. 아마 가디건이 아닌 제 나름대로의 '다정함'을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우습게도 어머니에게 별거 아니라며 처음으로 선물한 비싼 옷도 트위드 가디건이었던 게 생각나네요.



미술관 좋아하시나요? 저는 창조하는 걸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세상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즐거워 공부를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스스로가 현실을 너무나 잘 알던 어린아이였습니다. 예체능을 하면 집안 기둥이 휜다는 말이 지금은 다른 방법의 길도 분명 있다는 걸 알지만 그 당시의 저에겐 선택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분명하게 존재했습니다.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네 식구가 추운 겨울 연탄가스에 중독될 뻔한 일도, 우리 가족의 집엔 늘 세일할 때 사둔 라면박스가 꼭 있어야 했던 것도, 아픈 엄마가 바로 병원에 가는 걸 망설이는 것도, 떡볶이가 먹고 싶으면 교통비로 사 먹어 집까지 세 시간을 걸어왔던 것도, 같은 등수의 친구들이 받는 과외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던 것도 그런 저의 처지가 창피하여 친구들에겐 늘 둘러대며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들도. 어릴 때엔 선택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습니다.




그중 저를 가장 슬프게 했던 건 연기를 해야 하는 '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다 이해하는 척, 그림을 그리지 않고 공부를 하는 게 당연한 선택인 척, 집에선 착한 딸이 학교에선 누구보다 활발한 학생인척,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은 척. 그 '척'이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습니다.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진실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고, 저는 모든 굴레를 벗어나 그림이 그리고 싶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 길. 그렇게 자퇴를 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했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데미안]에서-

그렇게 사회에 나온 저는 운 좋게도 좋은 어른이자 예술가였던 이종학 작가님의 제자가 되어 그림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치열한 삶 속에서 기울었던 집안 형편도 점점 좋아지면서 저는 꽤 행복한 예술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경계 없는 삶을 그려나가는 건 아직도 배울게 많고 미숙하지만, 이제 적어도 저는 저를 연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저의 성향을 아는 터라, 저가 "니트 카디건을 만들고 있어."라고 말을 하였을 때 지인들은 다들 놀라 되물었지만, 그 뒤엔 격식 있는 응원이나 걱정 어린 시선도 아닌 그저 "그래? 그래서 이번엔 어떤 카디건인데?"라고 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물어봐주었습니다. 그럼 저는 "한국의 마고자와 로브 카디건을 결합한 스타일의 가을보단 좀 더 쌀쌀해진 겨울에 입기 좋은 카디건이야." 라며 이야기를 풀죠.


달보드레 가디건은 어감이 어여뻐 그리 정하였습니다. 디저트만큼이나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옷이 되길 바라면서.


아직도 비싼 옷을 사 입는 건 조금 사치이기도 하고 어색한 저이지만, 좋은 옷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저에겐 아직 '좋은 옷'이라는 명사는 '좋은 질'을 뜻하는 게 큽니다. 입었을 때 나를 든든하게 감싸주는 옷.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말이죠. 그런 옷을 가성비 있게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울과 캐시미어가 들어간 니트는 왜 그렇게 비싼지 만들어보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습니다.


'내가 원하던 헤어리함과 핏은 진짜 그 가격대여야 하는 걸까?' 직접 만들어보니 그 가격대 여야하는 게 맞긴 하더이다.


텀블벅 펀딩으로 제공하게 된 가격은 저가 프로젝트를 위해 깬 저의 목돈과 대출금 회수에 훨씬 못 미치는 가격으로 형성되어 버렸습니다. 막상 만들고 보니 이걸 팔아서 이윤을 남기겠다는 마음보다 누군가에게 연말선물로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컨설팅을 맡아주신 대표님이 아쉬워하며 '가격대가 비싸서 사람들이 많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다.'라는 식으로 말씀 주실 때마다 저는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최대한 내린 가격이었지만 어린 시절 저였으면 역시 살 수 없을 가격이었을 테니까요. 그건 조금 슬픈 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입었던 조명에 실이 반짝이던 카디건도 저에겐 '좋은 옷'이었던 것처럼 모두에게 어떠한 때와 오늘의 주어진 시간이 있을 뿐인 것 같습니다.


텀블벅 추천으로 메인에 걸렸었던 우리 프로젝트,


제 기억 속에 있는 선생님의 좋은 니트 카디건은 좀 더 근사했던 것 같지만, 아마 어린 시절 저의 눈으로 본다면 제 겨울 옷장 속 달보드레 가디건도 그에 못지않게 근사할 것 같습니다.


토록 숲 속 친구들


올해가 벌써 두 달이 채 안 남았네요.

어떤 해를 보내셨나요? 저는 사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슬픔을 마주 보아야 했던 해였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상실을 마주 봐야 하는 삶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계신가요? 한걸음 걸을 때마다 마음에 추하나 가 추가된다면 어른의 무게감은 어디까지 깊어지나요? 저가 이렇게 묻자 저가 좋아하는 언니의 대답은 '깊어서 무거워진 만큼 안정감이 생기는 것 같아.'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게 바로 꼰대가 된다는 거 아냐?'라고 말하며 언니와 함께 웃었지만 이제 그 말을 알 것 같습니다.


깊어진 올해, 비어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채워주는 옷을 만들 게 되어 기쁩니다. 그만큼 무겁고 안정감이 생긴 삶이 이제는 좋습니다.



모두의 겨울이 달보드레하길.




좋은 인연으로 받게 된 은주 대표님의 컨설팅과 디자이너 릴리 그리고 멋진 사진을 찍어준 요한 작가님 덕분에 저가 만든 카디건들은 체계적인 바구니에 담겨 사람들에게 12월에 전해지게 됩니다. 펀딩이 벌써 끝나가네요. 요한작가님의 스튜디오 사진이 특히 참 예쁘니까 구경 꼭 해보시길...!

https://tum.bg/FPbiWU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는 길에 적어봅니다. 오늘 오후 삼청동 갤러리에서 열리는 플리마켓 행사에서 가디건 시착을 해볼 수 있게끔 나갑니다. 오실 수 있으신 분은 들리셔서 인사하면 반가울 것 같아요. 직접 만든 스크런쳐와 댕기를 가지고 나가니 더 추워지기 전에 나들이 한번 나와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오셨다고 말씀 주시면 선물도 챙겨드릴게요!ㅎㅎ


[제7회 삐뚤빼뚤 굿즈마켓] 11월 23일 (토) ~ 24일 (일) PM 1시~ 6시

장소 : 서울 종로구 삼청로 82,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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