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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재 Feb 17. 2021

조선을 위한 변명

조선왕조 500년은 어떻게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가 되었는가

 지금으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난 2300년 어느 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아직까지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분명한 그 어느 날, 과연 우리 후손들은 지금이 시대를 어떻게 기억할까?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남부럽지 않은 소프트파워로 한민족의 과거를 빛낸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할까, 아니면 절벽처럼 깎이는 출산율과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집단 문화로 대표되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시대로 기록될까? 그 대답은 시간만이 말해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이 시대에 대해 많은 정보가 축적될수록 역사적 평가는 후자에 가까워지리라. 독자 여러분도 알다시피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포털 사이트에서 넘쳐나는 혐오와 분노는 눈에 채이는 모든 글에 녹아있다. 인터넷뿐인가? 뉴스는 연일 불경기와 저출산, 사회적 모순으로 고된 서민들의 삶, 극단으로 치달은 남녀 갈등과 여야의 정쟁을 쏟아낸다. 300년 뒤 역사학자들은 그런 1차 사료들을 보며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정말 돼먹지 못한 나라였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 그런데 대한민국의 역사적 평가가 조선과 무슨 관계냐고?


 서두가 길었다. 내 첫 글의 주제는, "조선을 위한 변명"이다.

역대 조선 국왕들 (출처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마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대한 글이나 동영상에는 으레 조선이 얼마나 형편없고 우스운 나라였는지 열변을 토하는 의견들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정말로 조선은 돼먹지 못한 나라였던 것일까? 국뽕에 물든 한국 사학계의 모략으로 우리가 잘못된 역사를 배웠을 뿐, 실제로 조선은 망해도 싼 나라였을까? 나는 역사학 전공자도 아니고 한국사에 빠삭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인물일 뿐이지만, 스스로의 비루한 의견을 내 보자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단계를 넘어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할 때 우리가 흔히 실수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것은 역사의 교훈을 얻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다. 또 이러한 맹점을 자세히 알려주는 글도 적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는 세 가지의 중대한 실수를 반복하며 잘못된 교훈과 해석을 재생산하고 있다.


 첫 번째, 역사를 스포 당하고 보는 추리소설처럼 받아들인다.

 추리소설을 볼 때 우리는 과연 범인이 누굴까, 탐정은 이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조마조마하며 소설을 읽어 내려간다. 특히 헷갈리는 상황과 엇갈리는 증언 속에서 자신만의 논리로 범인을 추측해보는 것이야말로 추리소설의 진정한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이는 가운데 아주 작은 허점을 찾아내어 사건을 해결하는 그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는 추리 소설이 기본적으로 제한된 정보가 주어진 상태로 전개되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희열이다. 하지만 역사는 다르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이미 굵직한 스토리를 아는 상태에서 인물과 사건을 평가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결과에 맞추어 과정을 비판하게 된다. 마치 스토리를 전부 아는 추리소설을 다시 읽을 때 주인공의 진실을 향한 노력과 시행착오들이 우스워보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당시의 한정된 정보, 상황과 맥락, 등장인물의 특성을 전부 고려해 보았을 때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들이 어떤 바보의 헛짓거리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이 점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1910년에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탄 당할 것을 안다. 1637년에 후금의 군세가 임금이 강화도까지 채 가기도 전에 남한산성까지 치고 내려올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결과에 맞추어 역사를 읽는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 생과 사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얻어낸 고뇌와 결정은 멍청한 옛사람들의 과오로 남는다.


 예를 들어보자. 17세기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워 저물어가는 명나라를 사대주의라는 명분으로 버리지 못하고 청나라라는 역사의 대세적 흐름에 거슬러 한 나라의 국왕이 다른 나라의 수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수치스러운 의식을 치러야 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빛났으나 멍청한 대신들과 인조가 다 망쳤다. 우리가 흔히 아는 조선에 대한 비판이다.

 이 문제를 현대에 빗대어 표현하면 이렇다: 중국의 무시무시한 성장세를 볼 때 우리는 미국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 미중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인 중국과 함께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그렇다. 미국이 옛날처럼 압도적이지 않다고는 해도, 중국이 아무리 떠오르는 태양이라 해도 이건 아니다. 미국은 우리와 같은 민주정체인 반면 중국은 독재국가이고, 6.25와 그 전후(戰後) 우리가 미국 덕을 얼마나 봤던가. 아직까지도 전시 작전통제권까지 이양하며 우리 땅에 미국 군대를 주둔 시키고 있고,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것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는 거대한 체제의 덕도 있는데 이런 식의 극단적인 주장은 상식적으로 틀렸다.

 자, 이걸 그대로 조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조선은 명나라가 지배하는 질서(사대교린) 속에서, 명나라와 비슷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거진 300년간 생존했다. 과거 섬나라 오랑캐가 침략해 왔을 때도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전적도 있다. 비록 청군이 승승장구하고 있긴 했지만, 결국 끝까지 산해관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넘지 못했다. 그들이 자랑하는 팔기군은 신식 대포인 홍이포로 무장한 명나라의 방어선을 넘지 못했다. 명나라는 예전만 못해도 아직 중원 대륙에 굳건히 버티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 방어선이 무너진 것은 청나라 팔기군의 말발굽이 아니라 이자성의 농민반란 때문이었다. 오히려 청은 명나라의 금수조치로 인해 식량난에 시달렸고, 이 문제를 타개하고 후방의 위협을 없애고자 조선을 침공한 것이었다. 만일 조선이 죽기 살기로 버티며 시간을 끌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렇듯 모든 사실관계를 파헤친 뒤 그 시대에 이입한 역사적 독해를 시도해보면, 역사적 평가가 쉽사리 내려지지는 않지만 비로소 그 평가에 진정성이 생긴다.


 두 번째, 사료에 대해 무비판적이다.

 "모든 텍스트는 정치적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글은 항상 현실의 무언가를 반영한다. 무언가를 반영하여 쓴 글은 의도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배우는 텍스트들에 우리는 무비판적이게 되기 쉽다. 다행히 우리 모두가 읽는 교과서는 그런 의도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사실과 주장만을 넣도록 공들인 책이다. 하지만 무수한 칼럼, 동영상, 대중서적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자료들은 비판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거짓 없이 사료의 적절한 편집과 배치만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사람들의 평가를 바꾸는 것은 아주 쉽다.


 일례로 구한말 선교사들의 기록이 있다. 그들은 귀족층 또는 부르주아 계층이거나 최소한 서구적 도시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추가로 그 당시에는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졌던 우생학이나 오리엔탈리즘, 인종 담론으로 무장하기까지 한 인물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은 귀중한 1차 사료인 동시에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할 문서들이다.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남는 감상은 그저 미개한 조선인과 우월한 서양인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도뿐이다. 이러한 구도를 "미개한 조선"에 덧씌우면 손쉽고도 인기있는 글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올바른 평가인지는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역사적 사건을 현대의 기준으로 생각한다.

 가끔 만화나 소설을 보면 모종의 초자연적 이유로 중세시대로 빨려 들어간 주인공이 현대의 사상적 배경을 이용해서 현대적 대의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인권과 경제, 과학기술의 첨단을 망라하는 초강대국을 만드는 이야기들을 볼 수 있다. 픽션으로써 퍽 통쾌하고 즐거운 상상이다. 대륙을 점령하고 대양으로 진출하는 이야기는 문약한 조선시대에 대한 불만으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억눌린 역사적 지배욕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게 정말 한 사람이 이룩하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여부를 떠나, 과연 중세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민평등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적 교리를 재해석한다고 쳐도, 민주주의 사상이 깊게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국민주권의식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민족 개념의 성립, 현대적 국가 개념의 확립, 정치철학적 배경지식의 광범위한 인지가 필수적이다. 어느 것 하나 중세시대에는 없는 것들이다. 아마 현대적 사상을 설파하는 사람이 그 시대에 떨어진다면 선동꾼으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기도 전에 평범한 사람들조차 동조해주지도 않을지 모른다. 지금의 관점에서 상식인 것들이 그 당시에도 상식이라 속단하는 것은 그저 수천 년 뒤에 태어났을 뿐인 거만한 후손의 망상에 불과하다.

 이는 역사적 사건들이 단순히 현대와 비교되는 것이 적절치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역사를 독해할 때 그 시대적 통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시대적 통념이 언제나 옳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변론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사건을 볼 때 현대인의 상식이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가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적어진다는 의미이다.


 조선은 과학발전을 백안시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비판도 이러한 생각과 궤를 같이한다. 일단 "과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우리가 아는 것과 비슷하게라도 형성된 시기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겨우 백 년이고, 서양의 경우에도 삼백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 이전까지 과학은 철학의 분과일 뿐이었고, 끼워 맞추기 식 논리로 현상을 설명했다. 이것이 유럽권의 자유로운 학문적 교류라는 풍토와 맞물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 과학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유럽권 국가에서 처음부터 대단한 혜안을 가지고 국가적으로 육성한 것도 아니고, 조선이 알면서도 모른 체한 것도 아니다. 과학이 우리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현대인들의 좁은 식견이 우리가 그렇게 보게 만들 뿐이다.

 더욱이, 전 세계에서 오직 유럽권에서만 벌어진 과학문명의 발전이라는 특수한 현상을 보편적인 것으로 인지하고 우리는 못했으니 열등하다고 비판하는 것 자체가 현대인의 초점으로만 역사를 바라보는 오류의 대표 격인 셈이다.


 슬슬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 몇몇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조선은 위 세 가지 오류들에 의한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국가다. 그 이유는 서두와 관련되어 있다. 바로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기록이 풍부하고 객관적이며 정확하기 때문이다.

 1차 사료를 찾아보는 역사 덕후들 정도나 되어야 알 법한 사실이지만, 전후관계가 완벽히 나와 있는 역사적 사건이란 의외로 흔치 않다. 그런데 조선은 특유의 투철한 기록정신으로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을 비교적 명확히 기록해 두었다. 그러니 자연히 스포일러 당할 것이 많아지고(첫 번째 오류), 의도적인 짜깁기가 용이하며(두 번째 오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많이 보이게 된다(세 번째 오류). 최대한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적어서 후손들에게 참고하라고 주었더니 후손들이 선조들을 욕한다면 그 시대 사람들은 지옥에서 미쳐 펄쩍 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선조들의 죄라면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원래 기록을 손대지 않고 "후세가 판단하도록 하라"며 정권 교체 이전의 기록까지 남겨놓았던 투철한 기록정신뿐이다.

 역사에서 반성할 점을 찾는 것은 물론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제대로 된 교훈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순히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식의 교훈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교훈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한국사 최대의 희생양이 바로 조선시대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들어섰던 어떠한 정치체제보다도 정치, 경제, 문화적 차원에서 강대하다는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실제로 우리는 이 땅의 절반짜리 황금기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후대들이 오늘날 우리와 같이 역사를 읽는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모순점과 주위의 강대국들이 일으키는 파도에 빠져 죽지 않도록 발버둥 치는, 국토조차 반토막난 흑역사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야 우리의 시대가 암울하다는 증거는 그 어느 시대보다 차고 넘치니 말이다.

 덜 생각하고 단정짓는 건 쉽고 명확하다. 가능한 모든 증거를 모아 더 생각하고 의심하는 건 어렵고 모호하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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