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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재 Mar 03. 2021

누가 유대인을 죽였나

20세기 나치의 시대와 21세기 혐오의 시대

 16세기 베네치아, 안토니오라는 기독교인 상인이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그의 가슴살 1파운드를 떼어내겠다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의 요구에 사람들은 샤일록에게 묻는다. 그 가슴살 1파운드로 무엇을 할 것이냐고.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vof6yWNN-8&ab_channel=%EC%95%8C%ED%8C%8C%EC%B9%98%EB%85%B8%ED%8B%B0%EB%B9%84AlPacinoTV

낚싯밥 하지요. 그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도 내 복수엔 쓸모가 있을 거요. 그는 날 망신시켰고 내가 오십만 정도를 못 벌게 했으며, 내 손실을 비웃고 이득을 조롱했으며, 내 나라를 모욕하고 내 거래에 훼방을 놓았으며, 내 친구들은 냉담하게 적들은 흥분하게 만들었소. 이유가 뭐냐고요? 내가 유대인이란 겁니다. 유대인은 눈 없어요? 유대인은 손도 기관도 신체도 감각도 감정도 정열도 없냐고요? 기독교인과 같은 음식 먹고 같은 무기로 상처를 입으며,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방법으로 치유되며, 여름과 겨울에도 같이 덥고 같이 춥지 않느냐고요? 당신들이 우리를 찌르면 피 안 나요? 간지럼을 태우면 안 웃어요? 독약을 먹이면 안 죽어요? 그런데 당신들이 우리에게 잘못하면 우리가 복수를 안 해요? 우리가 나머지 부분에서 당신들과 같다면 그 점도 닮을 거요. 유대인이 기독교인에게 잘못하면 그는 겸손하게 뭘 하지요? 복수하죠. 기독교인이 유대인에게 잘못하면 그는 기독교인을 본받아 인내하며 뭘 해야 하지요? 그야, 복수해야죠. 당신들이 준 비열한 짓을 난 실행할 겁니다. 그리고 어렵긴 하겠지만 교육받은 것보다 더 잘할 겁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


 시점을 뒤로 한참 돌려서, 20세기 중반 예루살렘,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재자에 동조한 죄로 한 독일인이 재판정에 섰다. 그는 자신의 혐의는 인정하지만 자신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죄가 없다고 항변했고, 이를 지켜보던 한 유대인 철학자는 그의 평범함에 주목한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 출처: Encyclopædia Britannica Article "Adolf Eichmann"
‘악의 평범성’, 이는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낼 뿐이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이 문장으로 독일인 모두는 함께 짐을 짊어졌다. 평범하게 성실했던 사람들마저 모든 것을 독재자의 잘못으로 치부하고 스스로를 부당한 시대를 견뎌낸 피해자 중 하나로 묘사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독재자는 당대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에서 모두의 손에 의해 정당하게 뽑혔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자신이 독재를 할 것이라는 사실, 인종주의적 견해, 전쟁에 대한 열망 어느 것 하나 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중은 그를 택했다. 하지만 그들의 죄가 오직 그를 선택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근원을 찾자면 좀 더 과거로, 베니스의 상인들의 시대들보다도 조금 더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야만 한다.


 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뿌리 깊다. 못해도 중세시대부터 그들은 핍박받아왔고, 줄곧 주류 커뮤니티에서 소외되다 르네상스 시기 마녀사냥에 휘말리는 일도 잦았다.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핍박받는 이유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들의 땅에 살면서 기독교로 개종하려 하지 않았고, 그들이 천히 여기고 서민들을 고통에 몰아넣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했으며, 무엇보다 그들은 성서에 적힌 예수를 죽인 민족이었다. 지금 와서야 이런 이유들이 핍박받을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여겨지지만,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수백 년이 흘러 비로소 근대에 들어서고 기독교가 시대를 이끄는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잃으면서, 유럽 사회에 녹아든 유대인들은 ‘유대인’이기 이전에 ‘국민’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갔다. 그렇게 그들은 유럽 땅에 ‘오래도록 함께 해 온 별난 이웃’ 정도의 지위로 자리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은 사람들 마음의 가장 어두운 곳에 아직 잠자고 있었고, 한 독재자가 그 어둠을 일깨웠다.


 실제로 그러했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홀로코스트는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비단 독일인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지역 주민들은 직접 나서서 숨어있는 유대인들을 고발하거나 학살을 묵인했다. 그들이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은 그들을 위한 변명으로 충분치 못하다. 유럽인들은 홀로코스트의 목적도, 결과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진지하게 유대인은 악이라는 나치의 선전을 곧이곧대로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은 나치라는 악마 하나의 강림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려 수많은 작은 악마들이 나치라는 면죄부를 얻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정도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는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혐오, 저런 혐오, 혐오할 것이 참 많기도 하다. 이 혐오라는 감정은 아주 독특한데, 수백 년 동안 유럽을 휩쓴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는 또 다르다.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그들이 국가의 부를 독식하거나 국가의 공산화를 꾀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나타났다. 모종의 이유로 스스로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감각에서 나타난,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다. 그러나 혐오는 먼저 권력적 상하관계를 상정한 뒤에 이루어진다. 요컨대, 우리는 직장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했을 때 혐오감을 느낀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혹은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못해도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반면 ‘반감’이라는 단어는 두 상황 모두에 잘 어울린다. 혐오감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인 ‘더러움’, ‘불결함’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자신보다 낮고 불결한 존재가 접근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이 혐오라는 감정은 단순한 반감보다도 파괴력이 크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당신은 햇살 좋은 어느 주말에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커다란 소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집에서 싸 온 김밥 통을 열었는데, 웬걸, 소나무에서 커다란 송충이 한 마리가 김밥 통에 떨어진 것이다. 당신은 아마 깜짝 놀라며 김밥 통을 엎고는 송충이를 밟아 죽일 것이다. 당신은 혐오스러운 송충이의 사체를 보고 징그러워하며 김밥을 엎은 것을 아까워하리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러분이 일말의 고민 없이 송충이를 밟아 죽였다는 것, 그리고 이 행위를 당연하다 인식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혐오스러운 곤충을 밟아 죽인 것이 잘 된 일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곤충의 생명도 소중히 하자’ 따위가 아니라, 혐오라는 감정이 불러일으킬 행위는 단순한 반감보다도 극단성을 띄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불결한 대상에 대한 탄압은 구구절절한 이유를 붙일 필요 없이 감정적으로 아주 쉽게 정당화되어 반성이나 성찰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부분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외국인, 성소수자, 무슬림 등의 사람들이 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을 수식할 때 ‘더러움’, ‘불결함’, ‘천박함’, ‘미개함’이 자주 쓰이는 것이 그 증거이다. 한국은 아주 오랫동안 문화적, 인종적으로 동질성을 지닌 사람들이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의 타자화는 더 간편하고 본능적이며,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는 자부심과 그에 반해 충족되지 못한 개인의 사회적 욕망이 공존하며 뒤틀린 사람들의 마음은 타자화의 밭에 혐오의 씨앗을 뿌린다.


 어떤 이는 우리 사회의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유대인 학살을 끌어들이는 것은 잘못된 인용이라며, 현대의 다양한 혐오들은 나름의 이유와 맥락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또 혹자는 ‘혐오할 자유’를 내세우기도 한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악마적 역사를 현대의 혐오에 덧씌우면 자신이 악인이 된 양 불쾌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오늘날 누군가를 혐오하는 사람은 과거 나치에 협력한 유럽인들과 같은 죄인도 무엇도 아니다. 혐오의 감정을 가지는 것 자체를 죄악시해야 하냐는 문제도 논쟁적인 주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홀로코스트가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이유 있는’ 반감을 등에 업고 '평범한 사람들의 지지' 아래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탄압이 가진 특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 말은 즉, 이 감정이 누군가 행동력을 가진 이 – 그것이 나치가 되었든, 정권이 되었든, 아니면 사회적 운동이 되었든 – 에 의해 파괴력을 가지게 될 때, 우리 모두는 공범으로 역사의 법정에 오르게 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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